한가로운 휴일 아침, 베란다에 내어 놓아 시원해진 귤을 까먹으며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방 안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순간 스피커에서는 10cm의 노래 '오늘의 날씨'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날씨를 누가 믿느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지 말아요."
문득 묘한 느낌이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귤을 내려놓고 읽던 책 사이에 책갈피를 꽂은 뒤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며칠 사이에 집안에서도 느껴질 만큼 서늘해진 공기를 가르며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다. 노래 가사처럼 일기예보를 믿지 못하는 불신주의자는 아닐지라도 예보에서 내린다는 눈의 소식을 듣고도, 살짝 비처럼 혹은 금세 녹아 사라지는 여느 겨울 그 흔한 첫눈처럼 이번 첫눈도 그다지 큰 감회 없이 지나가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올해 첫눈은 달랐다. 늦게까지 가을의 기운이, 아니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던 해인지라 유독 늦게 찾아온 첫눈은 마치 겨울이 "이제 내가 왔다"라고 말하며 그 존재감을 뽐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큰 눈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아침에 잠시 책을 읽다 창밖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세상은 온통 하얀 빛깔로 뒤덮여 있었다. 꿈인 것도 같아 발바닥 사이로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외출 준비를 하다가 눈 때문에 젖을 신발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동차들, 옷과 머리를 적실 눈발을 생각하며 잠시 괴로움에 망설여졌다. 눈발을 가려줄 작은 우산과 손을 따뜻하게 감싸줄 장갑을 챙기고 마음의 준비까지 단단히 한 뒤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마주친 발목까지 쌓인 눈과 쏟아지는 굵은 눈발이 비로소 겨울이 왔음을 실감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해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내리는 짙은 눈을 구경했다.
"예전에 우리 어릴 때 4월에 큰 눈 왔던 거 기억해?"
"기억하지 그때 학교도 일찍 끝났었잖아. 버스도 못 움직이고 차들이 다 서있어서 집까지 걸어가면서 엄청 힘들었지."
"나는 이렇게 눈 많이 올 때면 항상 그때가 생각이 나더라."
"맞아. 나도"
"근데 그땐 집까지 걸어가면서도 왠지 즐거웠어. 걱정도 없었고."
"그러게. 지금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을 나설 때보다 더 굵어진 눈발과 길가에 쌓여 녹지 않은 하얀 눈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걱정과 내일 다가올 출근길에 대한 걱정, 불편해질 일상에 대한 걱정들이 한가득 밀려들었다. 걱정이 쌓여 무거워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쏟아진 걱정을 털어내다가 나는 언제부터 내리는 눈이 걱정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구름이 몰려 또 한바탕 소나기를 뿌리고
우산 따위 있을 리 없지
오늘 분명히 비는 없다 했는데, 그랬는데"
돌아가는 길 집에서 듣던 노래가 차 안에서 다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