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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엔 Dec 16. 2020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나 혼자 몰래 써두었던 연애 편지를 보낸다면 어떻게 될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라진'처럼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아 혼자 시작했다가 혼자 끝낸 짝사랑의 경험은 물론 나에게도 있다. 이 영화는 라라진이 남몰래 누군가를 짝사랑할 때마다 절절히 써내려간 연애 편지들을 차마 보내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 편지들이 짝사랑 당사자들에게 보내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라라진처럼 이제와 부치지 못한 연애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내 연락망에 그 남자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거니와 어떤 방법이 생겨 보낸다 하더라도 두 아이 엄마가 된 중년 여자가 보낸 러브레터는 받는 사람에게 공포에 가까울 것이다. 주인공 라라 진과 나의 다른 점은 이것이다. 라라진은 풋풋한 16살이고 짝사랑했던 남자들도 다행히 미성년이며 미혼이라는 사실. 

영화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 중


누군가에게 고백하거나 연애를 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 처지이니 예전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지금 고백 편지를 보내는 불상사는 상상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대신 내가 라라진의 나이 즈음에 썼던 연애 편지를 추억해보는 편이 훨씬 순수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 대놓고 고백은 못했지만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낸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아니 많이 보냈다. 한 사람에게.


중3 겨울방학에 친구와 둘이 스키캠프를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스키 강사. 스키 선생님이라 해도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던 그를 보고 나는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나를 가르치던 강사도 아니었는데 스키캠프 3박 4일 동안 유난히도 스키장, 식당 등에서 자주 마주쳤고 결정적으로 공중전화 부스에 앞뒤에 서게 되었다.(이해를 돕자면 삐삐와 공중 전화가 주요 통신 수단이었던 시절, 그 때도 사람이 살았다.) 그 스키 강사는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동전이 없다면서 나한테 50원만 빌려달라더니 꼭 갚겠다면서 뒤돌아 가던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 학교, 학과를 큰 소리로 알려주었다. 나는 이것이 무척이나 로맨틱한 첫 만남이었다고 꽤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외모는 대학생이 여중생에게 작업을 걸 만큼의 빼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50원이 정말 필요했던 모양이었고 50원도 우습게 보지 않는,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스키장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알려준 학교, 학과로 편지를 보냈고 자신의 학교 학생 식당에서 돈까스를 사주는 걸로 50원을 갚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편지가 오갔다.


이렇게 나에게도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와 같은 하이틴 연애 편지가 있었다. 물론 라라진과 피터처럼 사랑에 골인했다는 결말은 없다. 학창시절 혼자만의 짝사랑 이야기이고, 중학생도 보은의 대상으로 여긴 인간적인 한 대학생의 이야기일 뿐이다.


뉴욕 최상위층 명문 고등학교의 학생들의 얽히고 설킨 사랑 이야기인 미드 <가십걸>은 보다가 손발이 오그라들어 시즌1의 2회 중간에 포기했다. '아니, 고등학생 신분으로 저럴 수가..'라는 앞뒤 꽉 막힌 꼰대 마인드와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 때문이리라. 그런데 <내가 사랑한 남자들에게>는 네 번 정도 보았다. 분명 이 영화에도 미성년자로서 수위를 넘는 씬들이 연출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거북스럽지 않은 이유는 나같은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에게도 일어났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 어퍼이스트 사이드의 최고 잘 나가는 여학생이 아닌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아웃사이더인 라라진의 고백 편지가 피터에게 보내졌고 여드름 난 단발머리 16살의 나도 대학생 오빠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내가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몇 번이나 봤다는 것은 어쩐지 좀 부끄러워서 굳이 여기저기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주인공 라라진과 피터가 너무 매력있고 잘 생겼으니 한 번 재미삼아 보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마음에 두고 혼자 가슴앓이만 하던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누군가를 짝사랑하던 그 시절이 그저 이불킥을 부르는 과거가 아니라 영화 같은 날들이었다는 것을 잠시나마 확인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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