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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실장 Jul 06. 2021

완전한 행복

2021_08(스물세 번째 서평)

_ 생일 선물 뭐 사줄까?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던 와이프가 갑자기 물었다.

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물음은 분명 기쁨 가득한 밝은 질문인데, 순간 난 왜 미안했을까. 늦게 퇴근한 주제에 밥까지 챙겨 먹지 않아 저녁을 차리게 한 겁 없는 남편이기에, 그 미안함에 설거지라도 했어야 했는데 민첩하게 먼저 싱크대에 가지 못한 게으른 남편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호의에 가득 찬 질문에 스스로 겁을 먹고 지리는 것은 결국 내가 찔리는 게 많아서겠지.



그 묘한 기분엔 미안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황스러움도 있었다.

40여 년 동안 한결같았던 내 생일이 어느 날 한순간에 바뀌었다. 어머니가 불교에 믿음을 가지게 된 지 어언 30년. 공기 좋은 사찰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사찰음식을 먹고, 주변에 꽃과 나무들을 보며 불자의 삶을 보내실 거라 기대했던 아들에게 어머니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훨씬 엄청난 일들을 하고 계셨다. 처음엔 '입춘대길'정도가 쓰여 있는 노란색 종이를 붙이라 가지고 오시더니, 조금씩 내 지갑에 하나, 차에 하나, 옷장에 하나, 베개에 하나, 때로는 아주 작고 때로는 편지봉투만 한 사이즈의 이름 모를 것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실로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들 모두 비용이 들 터인데 매달 드리는 적은 용돈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니.

처음엔 중년에 이른 아들이 할 수 있는 잔소리를 발사했지만, 매번 그 잔소리가 어머니를 비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로는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_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시면 그걸로 됐어요. 어머니. 다만, 조금만 하세요. 적당하게..

전투에서 패한 패잔병이 포로가 되었음에도 자존심은 지켰다. 꼴에..

포로가 되니 생일이 바뀌었다. 그래야 운세가 바뀌어서 좋아진다는 설명이 짧게 따라왔다. 포로에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_ 책. 책 사줘. 완전한 행복.

생일 날짜가 바뀌어 인지하지 못했던 당황스러움과 설거지에 대한 미안함을 함께 엮어 소박한 선물을 얘기했다. 소박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제일 받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 부부가 5월부터 출간을 기다려온 정유정 작가의 신간.

사실, 부천에는 '희망도서 대출'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을 빌려서 볼 수 있는 아주 기똥찬 제도다. 누가 기획했는지 모르지만, 아주 훌륭한 공무원이라 인정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면 가끔 상식이라는 것을 X구멍으로 쳐드신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에 읽던 책을 덮을 때가 있다. 낙서와 줄 긋기를 넘어 뭔가 더러운 것이 묻어있거나, 페이지가 다음장과 붙어있는 경우엔, 저 발끝에서부터 종아리를 거쳐 가슴 언저리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험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특히 도서관에서 한 달에 10권은 족히 빌려 읽는 우리 와이프에겐 그 험한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순화시키는 일이 득도의 경지일 것이다.

나에게는 새로 구매한 책이 예상과 달리 별로이거나, 소장할 가치를 못 느낄 때 아쉬움이 많은데 (지난해 생전 처음으로 쓰레기라 욕하고 버린 책이 있었다.'더 해빙'이라고..), '희망도서 대출'이라는 서비스는 신간을 3주 동안 읽어보고 반납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어쨌든, 우리 부부가 올해만 30권을 넘게 이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완전한 행복'은 예약자가 많아 '대출'이 쉽지 않아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기에 최고의 선물이었다.




'7년의 밤'과 '종의 기원'이후로 몇 년을 기다렸던가.

서스펜스, 스릴러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을 기다린 이유는 작가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작가'정유정'은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이번 '완전한 행복'을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감탄사를 뱉었는지.. 표현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고 창의적임에도, 그 표현력이 5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에 가득 채워져 있으니, 때로는 쓰윽~ 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너무 아쉬울 뿐이다.


어떤 사건이 모티브가 된 건 맞으나,
등장인물, 배경 기타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에 의한 작품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상하는 대로 이 이야기는 한때 떠들썩하게 했던 고유정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런 피비랜내 나는 사이코패스적인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 악한 행동의 심리가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서 기원된 것일까 하는 고민 없이, 이야기적인 요소로만 읽고 '재밌다~'라고 책을 덮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주인공 유나가 '행복이란 뺄셈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그린 행복의 그림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비단 한 나르시시스트만의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오늘도 주변에서 흔하게 충분히 자기중심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를 볼 수 있다.

걸어 다니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고, 갑질을 하고, 성(남성, 여성)을 차별한다. 위반사실이 없음에도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한 차는 꼭 보복으로 갚아주고, 나와 다른 생각엔 어김없이 적으로 간주한다.

남의 눈치 따위 아랑곳 않고 내 행복만을 좇고, 그 행복을 위해서라면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 따위 문제 되지 않는 시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나는 성악설을 믿는 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이고 본능적이라 믿는다.

그러다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수십, 수백, 수천번의 좌절을 겪으며 포기라는 걸 배운다. 솔직한 욕구를 눌러 타인과 어우러져 살라고 배운다. 배려나 이타심이라는 우하한 포장지로 눌러 감추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언제나 한 개인의 억울함이다.

그렇게 꽁꽁 감춰둔 사람의 악한 마음들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 나쁜 건 그게 가장 가까운, 아니 만만한 사람에게라는 사실이다. 가족, 친구, 연인, 내가 어찌하든 나를 받아줄 것 같아 내가 가장 잔혹해질 수 있는 상대..

어차피 그렇게 던져버린 마음들은 언젠간 꼭 그 이상의 크기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 마치 부메랑처럼.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더 잘해야 하는 건데도 억눌러놓은 악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불쑥불쑥 튀어나와버리는 그 순간순간이 결국 사고를 쳐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순간 위험한 나르시시스트가 된다고 말한다.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은 맞으나, 누구도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욜로와 플렉스가 각종 sns에서 난리를 친다.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아우성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가가 글이 아닌 귀에 대고 얘기해주는 것 같다.

사람은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ps.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은 와이프, 널 만난 거라고.. 고맙다. 와이프. 와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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