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실장 Aug 06. 2021

아몬드

2021_09(스물네 번째 서평)

구병모 작가를 만나게 해 준 책 [위저드 베이커리]. (최근 구병모 작가의 [바늘과 가죽의 시(詩)]라고 하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잊힐만할 때쯤 TV 속 어느 채널에선가 보여주는, 심하게 촌스럽고 우리 주변의 영세한 삶을 너무 솔직히 그려 조금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잊게 해주는 너무도 현실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덕분에) 그래도 계속 보게 되는 영화 [완득이]의 원작을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이 [창비 청소년 문학상]이다. 


청소년 문학(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어른들이 청소년 시절에는 대부분 '수학의 정석'만을 읽었기에 이제라도 타이틀을 가리지 않고 읽어야 할 책이다. 

청소년과 성인이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르지 않으니, 이 또한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어색할 뿐이다.  






책은 감정이 결핍된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척하는) 우리 성인들에게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감정표현 불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윤재, 

그리움, 사랑, 용서와 같은 감정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누른 채 분노, 질투 등의 감정표현을 일삼는 곤이,

그리고 또 다른 친구 도라와, 윤재의 후견인이며 이웃인 심박사, 곤이 아빠 윤교수. 

그리고 윤재의 엄마와 할멈.. 



불행이란 놈은 언제 어디서 찾아올 것이라고 예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좋을 때 찾아온 불행이라고 해서 그 아픔과 상처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아픈 사람들을 두고(직접적으로 앞에서 대놓고 얘기는 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불행도 억지로 행운(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크게 다쳤을 때, 그만하길 다행이다~라고 위로하는 건 내게 닥쳐진 상황이 아니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다. 시험에 떨어진 누군가에게, 더 좋은 대학이나 점수(레벨)로 붙을 거야~라고 얘기하는 건, 내가 취준생이나 수험생의 세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건넬 수 있는 말이다.


조금은 내가 삐딱선을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파는 팩폭을 날리는 것을 보면..


주인공 윤재는 감정이 결핍되어 있기에, 상대의 감정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줄 말도 없다. 위로도, 공감은 커녕 함께 기뻐해 줄 수도 없기에 엄마로부터 배운 답변 1번, 2번, 3번을 상황에 맞게 말할 뿐이다. 그런 윤재가 자신을 괴롭히던 곤이와 친구가 되고, 도라라고 하는 여자아이를 만나고, 심박사라고 하는 후견인과 함께 지내며, 느껴지지 않는 감정들에 대한 자기 해석을 하게 된다. 그 해석이 어떤 이에게는 괴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지극히 내 개인적인 관점에선 최고의 위로로 보인다.(냉정해 보이기는 해도, 아주 객관적이기에..)

결국 윤재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고, 조금씩 감정이란 것을 느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지만, 그것이 과연 머릿속 아몬드(뇌의 편도체)가 자라게 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이 소설은 happy ending을 그린 것일까라는 고민으로 난 여전히 ending에 이르지 못했다.


느낄 수 없는 것이 불행이었던가..  

(이 고민을 한참 하고 있는 중이다.)






청소년 소설이라 쉽게 책을 들었지만, 책을 덮을 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윤재의 후견인 겸 이웃인,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심박사도, 그 자신이 와이프의 죽음으로 인해 깨달음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는 차가운 심장과 뇌를 가진 의사일 뿐일 것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 심박사가 좋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심박사를 만든 과거의 불행(와이프의 죽음)이 '그나마 다행'이 될 수는 없다.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모든 사람이 자란다면.. 

자라면서 겪는 불행이, 사람들이 위로하듯이 '그나마 다행'혹은 '행운'으로까지 전환될 수 있는 것일까?

감정을 느낄 수 없기에.. 마음속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불행일까? 아님 행운일까?

(좋은 상황, 나쁜 상황, 뭐 이런 상황별 변하는 대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대로 좀 식상한 결론일지 모르는 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읽는 독자에 따라서 그 결론이 심오하게도 느껴질 것도 같다.


눈이 내리던 생일날. 피로 눈을 물들인 엄마가 쓰러져 있다. 할멈이 보인다. 표정이 맹수처럼 사납다. 표정이 맹수처럼 사납다. 유리창 너머로 나를 향해 외친다. 가. 가. 저리 비켜! 그런 말은 보통 싫다는 뜻이다. 꺼져 버리라는 뜻처럼. 
피가 튄다. 할멈의 피다. 눈앞이 붉어진다. 할멈은 아팠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면서도 그 아픔을 겪는 게 내가 아니고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읽다가, 가슴이 아리고 쓰라렸던 부분)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만 접고 잠시 산책이나 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전한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