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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요 Mar 05. 2024

상세불명의 우울 에피소드

우울증을 진단받기까지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되어본 적 있는지. 나는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오랜 시간 이미 껍데기로 살아온 후였다. 스무 살 즈음부터 나는 자주 가라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남들도 그런 줄 알았다. 다만 내가 좀 더 가난했을 뿐이었다. 아픈 아빠가 있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간호했고, 고등학생인 동생이 있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나뿐이었다.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로 벌 수 있는 돈이 많지는 않았다. 그마저도 가족의 생활비로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하루 2천 원 내외로 쓰던 식비보다 아까웠던 것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광역버스비였다. 그래도 간혹 아빠의 모자란 병원비와 동생의 급식비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돈이 필요했던 일들이 생기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특히 사소한 일들에 그런 기분을 느꼈다. 화장지나 생리대 같은 생필품들은 왜 그렇게도 빨리 떨어지는지. 아픈 아빠가 좋아하는 수박은 하필 그 해에는 그리도 비쌌는지. 친구들을 만나려 해도 돈이 필요했다. 아니, 사실은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빠져버리고 싶었다. 깊은 늪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가라앉을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사회에서 가라앉아 버리면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발버둥을 치며 버텼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들을 지나려면 숨을 참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이를 악물고 울면서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만났다. 어디로든 떠나버리고 싶을 땐 서울역 기차 플랫폼에서 하염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떻게든 대학을 졸업했고, 토익이나 자격증 시험 같은 취업 비용을 최소화하며 취직도 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숨이 가쁜 날들이었다.

 

 보통의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가난은 티가 났다. 그것은 대부분 스스로가 눈치채지 못한 것들로 인해 들킨다. 나의 경우에는 태도였다. 지갑 사정만큼이나 움츠러들었던 내 자존감, 내 부족한 사회 경험이 나를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어깨를 좁히며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세상에는 어깨를 좁히며 살았던 스물다섯 살의 신입 직원을 이용하는 못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또한 버텼다. 숨을 참았다. 이제는 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숨을 더 차게 만들었다. 그러다 질식 직전의 어느 날, 나는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 안에서, 욕을 섞어서, 그 많은 눈들이 날 쳐다볼 정도로. 

 

 그 일 때문에 부서를 옮겼다. 그래도 한동은 그 수많은 눈들이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날 보고 수군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돼 한동안 그 어떤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바탕화면의 빈구석만 쳐다보는 날이 늘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까지 그냥 머릿속에 지지직거리던 잡음들과는 달랐다. 집중할 수 있는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안 남은 듯,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껍데기, 모든 것이 녹아버리고 빈 껍데기로만 남은 사람 같았다. 그러고선 일순간 파도처럼 이 인생은 구제 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나고, 다시 멍해지 고를 반복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힘들었다. 좋은 사람들, 나를 도와주던 친절한 사람들의 눈 마저 그때 날 쳐다보던 그 눈들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상이 조금만 어두워지면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연락에 답이 늦으면, 내 물음에 무표정으로 ‘응’이라고 대답하면, 나는 드디어 내가 싫어졌구나. 구제 불능인 나를 참아주는 것에 한계가 왔구나. 그런 생각을 계속해나갔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처음 정신의학과에 가봤다. 그즈음 일에 집중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업무 실수가 많기는 했었으나, 정도를 넘었던 일이 있었다. 날짜에 맞춰 서류를 정리해야 했는데, 10부터 1까지 거꾸로 셀 수가 없었다. 그 방식으로 서류를 분명 정리해 놨는데, 다시 보니 순서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내가 바보였던 것이 아닐까. 정말 구제불능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병원에서 구제불능 바보인 것을 확인해봐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병원을 가기 두려웠던 이유는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요, 별거 아닌데 왜 유난이세요, 하는 말을 들을까 봐서였다. 나조차도 나를 별 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으니 그냥 별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겁난 마음으로 갔던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와 의사의 상담 후 진단을 받았다. 진단명은 '상세불명의 우울에피소드'. 숫자를 거꾸로 세지 못하는 건 우울증으로 인한 일시적인 인지 능력 저하, 쉽게 말하자면 가성치매라고 했다. 우울증, 그 말은 가성치매보다 더 눈물이 나게 만들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너무나도 불쌍해졌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말하는 나의 그림자는 뿌리가 너무나도 깊어서, 이제는 이 그림자를 나의 기생물로 생각할 게 아니라 내가 그림자의 기생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 해를 주기로 우울했다 멀쩡 했다를 반복하면서 알바를 하고,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던 날들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나를 별것으로 생각했다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지났을 예쁜 나이들이 피해의식과 자기부정으로 진흙탕에 처박힌 채 지나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그동안 괴로웠던 그 지난날들이 나의 탓이 아니었고, 나의 일부인 줄 알고 데리고 살았던 그림자가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이 그림자에 나는 얼마나 많은 자존감을 먹이로 주었던가. 나 자신을 얼마나 바쳤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마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억지로 사랑하며 울었던 그 마음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얼마나 이 끔찍한 걸 키워왔던가.


 병원에서 나오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눈이 부은 채로 탄 버스는 나를 좋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로 데려다주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며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좀 더 났다. 날 기다리던 사람들이 어디 아프냐 물어서 아프다 했더니 나보다 더 날 걱정했다. 그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안쓰러움이 이제야 보였다. 그걸 모르고 살았단 사실에 또 눈물이 날뻔했다.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대신 울어줬다. 사실은 내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내 껍데기를 이들이 지탱해 주어서,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너 같은 애가, 그랬던 걸 미처 몰랐다고. 나는 그 장면이 못내 좋았다. 너 같은 애가 어떤 애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이런 사람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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