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담홍 Jun 12. 2024

혹독한 시기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소설을 필사하며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소설 / P.24

나에게 혹독한 시기는?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와 단둘이 집에서 지내면서 생각보다 불안감이 크게 밀려왔다. 

'아이들 어떻게 키워야 하지?' 하는 큰 물음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 분유를 어떻게 먹이고, 어떻게 씻기고, 어떻게 잠을 재워야 하는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책은 내 아이를 알지 못했다. 


이 힘듦을 남편에게 하소연했지만, 남편 또한 힘들었기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잠깐 잠만 자고 가는 사람. 이 당시, 나는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야속하고 미웠다. 나를 집에 꽁꽁 묶어두고, 나를 모른 척한다고 원망했다. 


남편에서 처음에는 하소연, 나중에는 싸움, 그다음은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산후우울증이 스멀스멀 나에게 다가왔다. 그 시점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산후조리원에서 만났던 영아 전집 판매하는 영사분이 우리 집에 방문했다. 아이 전집을 권유하기 위해서. 영사분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먼저 소개한 게 아니었다. 우리 아이를 먼저 봐주고,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내 눈에 영사분은 육아의 달인, 육아의 신이었다. 그분 말 대로 하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불안을 그분을 속속들이 어떻게 그렇게 다 아는지 신기했다. 나는 그만 그분에게 홀딱 넘어가 영사분이 하라는 대로 다 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덧 우리 집엔 책과 교구로 꽉 차 있었고, 빚이 오천만 원이 생겨있었다. 그것도 남편 모르게. 지금도 생각하면 꼭 뭐에 홀린 것 같다.


그렇게 책과 교구로 첫째와 놀고 있을 때, 둘째가 우리에게 왔다. 둘째 임신을 확인하러 가기 전날 밤. 자정이 되어도 남편이 집에 오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목소리가 이상하다. "술 마셨어?"라는 나의 물음에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얼마 뒤 퇴근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새벽 2시, 3시가 되어도 남편은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 새벽 4시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서야." 쿵.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온 남편에 입에서 흘러온 말은 음주 운전을 했고, 트럭과 부딪쳤다는 거였다. 상대편 트럭은 전복돼서 폐차됐고, 상대편은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많이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찰과상 정도라고 했다. 다행히 남편도 다치지 않았다. 우리 차 문 한 짝만 찌그러졌을 뿐.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은 걸 하늘이 도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뒤로 합의금과 벌금, 수리비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돈이 없어 결혼할 때 했던 폐물을 팔아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빚은 또 늘었다.


배는 점점 불러왔고, 집을 이사해야 했다. 이사를 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했기에 내가 진 빚을 남편에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남편에게 털어놓았고, 그 뒤부터 우린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둘째 임신했을 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터울이 20개월 차이 나는 두 아이. 임신한 배는 앞으로 불뚝, 등 뒤엔 첫째를 업고 다녔다. 꼴도 새벽에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 번으로 등원시켜 놓고 출근했다.  회사 일이 끝나고 부리나케 아이에게 달려가 맨 꼴찌로 하원하는 아이를 등에 업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육아와 살림은 모두 내 몫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둘째가 6살, 7살이 되었을 때도 남편과 사이는 좋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헐뜯고 있었다. 싸움이 지나쳐 경찰이 오기도 했고, 밤 중에 언니 집으로 가출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아이들 때문에 버틴다는 말이 절로 나왔던 시절이었다. 나는 늘 이혼을 생각하고 살았지만, 이혼을 하진 못했다. 


둘이 열심히, 치열하게 살면서 형편이 점점 나아져 갔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함께 웃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자신만 보던 시선에서 상대를 향한 시선을 보냈다. '아, 이 사람이 그래서 그랬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모르는 척한 게 아니라 배려한 거였구나'하며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조금은 늦었지만 깊게 바라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우리 부부는 꽤 잘 지내고 있다. 접시에 흠이 나거나 깨진 것을 이어 붙이고 채우면서 새롭게 장식된다는 킨츠기처럼 우리 부부는 킨츠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깨진 것을 별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고 다시 깨진 자리로 도약하려는 중이다. (쓰기의 일기, 서윤후 문장 인용)


혹독한 시기가 아름다운 나날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살아가 본다.

킨츠키는 접시에 홈이 나거나 깨진 것을 이어 붙이고 채우면서 새롭게 장식하는 공예를 의미한다. (...) 
접시의 깨진 자리나 파인 홈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헤아리는데 필요한 자기만의 도구가 있으리라고. 깨진 것은 별수 없다고 물러 서지 않고 다시 깨진 자리로 도약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문법이다.

<쓰기일기, 서윤후>
(마음영양제 프로젝트에서 클로드 님이 공유해 주신 문장)


매거진의 이전글 하고 싶은 것을 모를 땐 하기 싫은 걸 적어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