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카레니나 1, 톨스토이 / 민음사>를 읽으며...
<412-413쪽>
"당신은 어떻게 나 때문에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었을까? 난 당신이 불행하다는 것 때문에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내가 불행하다고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환희에 찬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난 말이죠, 굶주려 있다가 먹을 걸 얻은 사람과도 같아요. 어쩌면 그 사람은 추울지도 몰라요. 옷도 너덜너덜하고 수치스러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사람은 불행하지 않아요. 내가 불행하냐고요? 아뇨, 이게 나의 행복인걸요....."
안나와 블론스키. 임신까지 한 안나. 그러나 자신의 남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 도망갈 생각은 없는 듯싶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이혼이라는 것이 쉽지 않고 한다고 한들 '부정을 저지른 쪽은 자녀의 양육권과 재혼할 권리를 박탈당(412쪽)'한다고 하니 안나는 아들을 버리고 브론스키에게 가긴 힘들었을 테지. 그러나 뱃속에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행복과 불행은 자신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보기에는 평탄하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어도 불행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보기에는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 게 불행해 보여도 당사자는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안나는 평온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고 한다. 기계 같은 남편에게서 벗어나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한다. 수치심을 느낄지언정 행복하다고 말한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언제였을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혼을 결심하며 집을 뛰쳐나오고 울고불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남편과는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들과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걸 행복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행복과 불행이 한데 뒤엉켜있었다. 때때로 행복이 조금 더 컸고, 때때로 절망감이 조금 더 크기도 했다. 서로를 저울질하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 고민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늘 우리 삶은 행복과 불행함이 절적한 비율로 드나들고 있다. 그 적절함을 유지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기만 하다. 사회와 가족은 나와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지만 나의 감정에는 관여할 이유가 없다는 듯 남처럼 굴기만 한다. 나를 힘들게 해 놓고 정작 자신들은 뒤짐 지고 물러나있는 행태에 여러 번 분노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역시 사회와 가족이 나에게 무언가를 주진 않는다. 내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명제만 안겨줄 뿐이다. 예전에 비하면 평탄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런 만큼 신비스러운 감정은 사그라들고 대신 남편과의 소통이 수월해져 평온하다. 이 평온함에 사랑이 한껏 묻어있다고는 볼 수 없다. 사랑보다는 편안함이라는 형태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서로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이제는 알고, 책임을 다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굳이 불행과 행복을 놓고 보자면 행복이지만 그렇다고 펄덕거리는 삶은 아니다. 잔잔한 행복이라고 할까. 어쩜 이건 내가 바라고 바라던 삶이었다.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껏 애써왔고 앞으로도 애쓸 테니깐. 사랑이 꼭 펄떡거리고 정열적일 수는 없으니깐. 나이가 먹어가면서 감정이 평온해지듯 이것도 한 과정일 뿐이겠지. 이 또한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나 모든 게 수레바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