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나 공연장에 조금이라도 늦을라치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아야 했던 경험, 누구에게든 한번쯤 있을 것이다.
영화나 공연이 끝나고, 함께 했던 일행은 뒤처질세라 부지런히 중앙통로로 빠져나가기가 바쁘다.
어둠 속에서 공간과 거리의 지각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로서는 한 발을 내딛는 것이 여간 두려운 게 아니다.
요즘의 도시는 빛 공해가 심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너무 환해서 어둠이 낯설지만 내가 자랐던 시골의 밤이나, 어둠이 있는 특별한 공간이 나에게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흔히 밤눈이 어둡다는 경험을 톡톡히 하며
살았던 셈인데 내가 아주 어릴 적,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골의 어두움이 내겐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여러 형제들 중에서 유독 밤만 되면 잘 보이지 않아 자주 넘어지고 어두운 문밖에 나갈 엄두를 못 내어 걱정이 많았다는 엄마의 후일담이다.
정확히 몇 살 때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 집으로 이사하기 전 일이니까 아마 4~5세 즈음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떡 반죽의 덩어리를 떼어 작은 떡을 열심히 만들고 계셨고, 주위에는 언니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떡이 유난히 작았던 이유는 작은 아이가 먹을 것이라는 것 외에도 이유가 또 있었다. 일명 눈밝기 총떡, 재료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반죽을 열심히 해서 동글동글하게 만들어
쪄내었던 작은 떡이다. 그 떡을 다른 형제들은 못 먹고 오직 내가 먹어야 하는 떡인 것이다.
나중에야 나누어서 함께 먹었겠지만 내 기억 그 당시의 떡 주인은 분명 밤눈이 유난하게 어두운 나였다.
캄캄한 밤, 나는 혼자 방 안에 앉아 있고
엄마는 미닫이 방문밖에 떡 그릇을 들고 계신다. 미닫이 문살에는 창호지가 발라져 있었다.
창호지가 발라진 미닫이문을 침 발라 조그맣게 구멍을 뚫고는 주문을 외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올빼마, 이 떡 받아먹어라. 올빼마,
이 떡 받아먹어라.”
창호지 구멍으로 작은 떡이 들어오면
방안에 있던 나는 그 떡을 냉큼 받아먹었다. 재미진 놀이 같은 이 행동을 너도 나도 해보자고 달려들었던 형제들에게 엄마는 엄하게 안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행위였지만 아직 어린 딸이 가뜩이나 무서운 밤에 생활이 더 힘들게 될까 봐 눈이 밝아지기를 바라는, 나름 최선의 민간요법을 실시한 엄마의 마음이다.
글 모임에서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을 써 오라는 숙제를 안고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떠오른,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식 사랑에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우리 엄마가
이제 만날 수 없기에 더 그립기만 하다.
아주 오래전, 어린 딸의 눈이 밝아지기를 마음속 깊이 염원하며 작은 떡덩이를 부지런히 굴리시던 엄마의 진한 사랑이 가슴깊이 스며든다.
“엄마, 나도 친구들보다 밤눈이
어두워서 좀 불편해요”
아들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저런! 별게 다 유전되었구나”
염려스럽게 대꾸하며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 시대, 예전처럼 어둡지는
않지만 자잘한 불편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것이다.
눈밝기 총떡을 만드셨던 우리 엄마처럼
나도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텐데 나는 어떤
사랑의 떡을 만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