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여성의 3명 중 1명은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실제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겠다는 비혼족과 결혼은 했어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이 늘어가고 있다. 올해는 1981년 통계를 집계한 이례 출생률이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나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그들 중 하나였다. 결혼 전에는 독신주의였고 결혼 후에도 애는 낳지 말자였다. 그러던 나는 지금 15개월 된 딸아이를 키우는 대한민국 육아맘이다.
나는 왜 그토록 아이를 낳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처음 시작은 희미해져 가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이유 말이다. 30여 년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리고 세상은 어떠한 곳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결혼을 하면 달라질까 싶었지만 결혼 후에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를 갖는다는 건 내게 환상 같은 거였다. 내 몸속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생명을 품는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을 오롯이 보호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나와 세상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나에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미련은 마음 한편에 깊고 고요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게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니 말로만 들었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고통은 고작 10분의 1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임신을 했을 때부터 따라오는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은 내 상상을 매번 넘어섰다. 임신 전보다 최소 10kg이 더 나가는 나의 몸은 모든 근육을 경직시켰다. 점점 불러오는 배는 소화장애와 호흡곤란을 일으켰고 먹덧과 입덧이 번갈아가며 찾아왔다. 육체적인 변화만 있었더라면 참을 만했을지도 모른다.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감정은 매일 소용돌이쳤고 출산에 대한 불안감은 깊은 잠마저 빼앗아 갔다. 이렇게 10개월 동안의 임신 기간이 끝나면 또 다른 세계인 육아 월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후 3개월까지의 아이는 짧게는 2시간 길게는 4~5시간마다 일어난다. 100일이 넘어가면 소위 '100일의 기적'이라고 하는 통잠자는 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장통, 이앓이, 온도 변화 등의 변수들이 수시로 찾아와 아이의 잠을 방해한다. 임신 기간에 이어 이 육아 월드에서도 나의 수면욕구를 해소할 길은 없다. 그럼 깨어있을 때는 어떤가?
100일의 모유수유의 기간 동안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먹어야 하고 아이를 위해 짜내야 한다. 그렇게 나의 몸에서 나오는 양분을 아이에게 주고 나면 마치 내 영혼까지 준 느낌이다. 어떤 엄마들은 생후 2년 동안 모유수유를 했다고 하는데 진심으로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 그렇게 100일 동안의 모유수유를 끝내고 아이는 내 젖과 분리되었지만 아직 몸은 아니다. 아이가 뒤집고 앉고 기고 설 때까지 엄마는 아이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 출산과 동시에 아이가 분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아직 엄마와 분리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변화에 비해서는 가벼운 것이었다. 임신 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육아 우울증'이라고 했던가. 임신 때에는 그래도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는 있었지만 육아의 세계는 그게 아니다. 24시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인 아이에게서 내 시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아이와 한 몸처럼 붙어있다 보면 마치 아무도 없는 낭떠러지 앞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다. 어떤 날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나를 흔들어 댄다. 또 어떤 날에는 강한 햇볕이 내리쫴 내 마음과 영혼을 태우고 간다. 어떤 날에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비로 온몸이 흠뻑 졌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이 낳기를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을 잃게 될까 봐 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알고 싶었던 나와 세상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바람과 비와 햇빛을 마주하다 보니 더 또렷이 나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원래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 생각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아이와 무조건적인 희생을 주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생겨났다. 내가 계획한 세상 속에서는 없던 배움을 출산과 육아를 통해 온몸으로 겪고 있었다. 막연한 호기심과 실낱같은 미련으로 시작된 이 길이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와 배움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god의 '길'이라는 노래의 가삿말이 떠오른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나와 세상에 대한 확신을 찾아 계속해서 길을 헤매고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지금도 명확한 답을 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이 출산과 육아라는 길에서 내가 또 무엇을 겪고 무엇을 배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길은 여전히 나에게로 가는 길이며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