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화장실이다. 있을 때만큼은 완벽하게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곳. 항상 함께 있는 가족과 잠깐이라도 분리돼 오롯이 개인적인 시간을 보장해 주는 공간이다. 그런데 나는 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해 주는 공간도 보장받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엄마가 한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아이는 내가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았다. 문을 닫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문을 두드리며 문이 열릴 때까지 울음으로 시위한다. 볼일은 물론이고 남편이 없을 때에는 샤워도 문을 열고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프라이버시는 무슨 프라이버시. 오히려 아주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공간이 되었다.
혼자서는 못 사는 게 인간이라고 하던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해 틈틈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지만 아이에게 양해를 구할 수는 없는 일. 기쁘나 슬프나 우리는 Together.
사람 간에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그럼 아이와 나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나의 몸에서 태어난 또 다른 생명체. 이 존재와 내가 분리될 수 있을까? 실제로 아기는 생후 6개월 정도까지 엄마와 자신이 한 몸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이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엄마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자아'라는 것이 생겨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신체적 기능이 미성숙한 아이는 많은 부분을 엄마에게 의지한다. 분리된 자아이지만 또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와 함께 있으면 가끔 아이가 나인지, 내가 아이인지 모를 때가 있다. 온전히 움직일 수 없는 아이의 손과 발 노릇을 하다 보면 내 안에는 아이의 자아가 내 자아보다 크게 자리 잡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그마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내 자아를 볼 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온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사람에게 '같이'와 '따로'의 조화는 적절히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의 내 시간은 절대적으로 '같이'에 치우쳐있다. 24시간 한 몸처럼 붙어있는 아이에게 '따로'를 외치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느껴지는 이유 모를 불안감은 어쩌면 나의 공간과 시간의 부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부재는 나를 희미하고 밋밋하게 만든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뭐였는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였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헷갈리게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단순히 밥을 먹이고 놀아주고 재워주고 씻겨주는 육체적인 일뿐만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출구 없는 미로를 계속해서 헤매기도 하고 가파른 낭떠러지 앞에서 무작정 버티기도 하는 정신의 일들이 한데 뒤섞인 종합적인 것이라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다시금 아이와 나와의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분명 아이와 나는 사랑하는 사이지만 원하는 거리는 다르다. 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이 원하는 거리가 나와 맞지 않는다면 그 거리를 맞추어주는 것이 어쩌면 더 성숙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가까운 거리를 원하는 아이에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도 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적인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닌 노력과 인내로 이루어진다는 걸 아이를 통해 깨닫는다.
언젠가는 이 아이도 나와 같은 거리를 원하거나 아니 그보다 더 먼 거리를 요구하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평생 서로 다른 거리를 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거리를 맞추어주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나는 '엄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