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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진기행 Jun 21. 2021

'여지'없는 세상

대학생 시절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봤었다

상대편에 날 선 공격을 날리고

웬만해선 무릎 꿇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때는 이른바 '여지'라는 게 있었다


토론 말미에

형식적이어도 사회자는 물었다

"A는 B의 장점 하나만 얘기해주시죠"

"B는 A에 상당히 비판적이신데 그래도 하나 A에게서 받아들일만한 의견은 없으실까요?"

"서로에게 배울만한 점이 있다면요?"


2시간 남짓 죽일 듯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우다가도

끝날 즈음 이런 시간이 오면

양쪽 모두 다소 머쓱한 미소를 머금고

이성의 회로가 순간 멎은듯한 묘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180도 결이 바뀐 찬사를 짧게나마 내뱉는다


혹자는 토론 프로그램이

서로 기존의 입장차만 확인하는

무의미한 말잔치라 냉소하지만

그럼에도 이렇듯

어떻게든 수렴하고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그때는' 있었다

시청자는 다소 작위적이고 어색했을지 모르나

토론자들의 이런 노력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은 '여지'가 없다

인간 세상의 갈등은 이제

이념을 넘어 세대 성별 국가 인종까지

장르가 잘게 쪼개지고 있는데

기계적 화합 인위적 조화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A는 A말만 한다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개의치 않는다

B는 A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B의 말만 쏟아내고 토론장을 나선다

대안이 나왔는지는 관심 밖이고

내가 할 말을 다하고 나왔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여지' 없는 세상 속 사람들은 빠르게

스마트한 알고리즘 감옥에 갇혀간다

나와 다른 알고리즘은

잘 안 들리는 외국어 같고

시간이 더 흐르면

아예 안 들리는 외계어가 될 것이다

억지 화합이라도 꿈꿨던

그때 그 토론이 그립다

지금보다는 순수했고 지금보다는 희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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