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망다해 Aug 27. 2020

록커 김경호 뮤직비디오 속 아버지와 내 아버지

김경호의 노래 '아버지'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는지? 그 영상 속의 장면 하나하나는 애절한 노래 가사와 분위기에 맞게 연출된 것이겠지만, 때때로 내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 같이 떠오르는 것은 그 뮤직비디오 속 노래 가사와 그 영상 속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다.     


"가슴 깊이 묻어도 바람 한 점에 떨어지는 

저 꽃잎처럼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 ~~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나의 두 눈이 먼다 해도 난 그래도 그 한 번을 택하고 싶어."


김경호 가수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우연히 접한 뮤비 속 그 아버지의 모습은 내 마음속에 낙인처럼 깊이 박혔고, 때때로 가슴을 저리게 했다. 왜냐 하면 그의 모습은 내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였다. 얼굴이 까맣게 주름 투성이고, 너무나 가느다란 종아리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던 그 모습. 


뮤직 비디오를 봤을 그 당시엔 나도 젊었고, 아버지도 살아계셨고, 내 마음속에 현재 자리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아버지로 인한 아픔, 아쉬움은 없었다. 


하지만 김경호의 애절한 고음과 마음 아픈 노래 가사와 너무 잘 어울리는 그 아버지, 가난으로 인한 무능함으로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능력이 없었던 그 아버지의 이미지가, 늙어서 무력해지신 내 아버지와 연결되며 그렇게 마음을 울릴 수가 없었다. 

    

사실 김경호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많이 달랐다. 

    

내 어린 기억 속 아버지는 그 아버지처럼 무능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검정 고무신을 신은 것을 본 기억도 없고, 일자리를 부탁하다가 거부당하신 적도, 자신의 무능함에 눈물을 쏟던 일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또 자식이 필요로 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결국 기타를 훔치는 그런 종류의 일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셨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새벽에 소꼴을 베러 나가 지게 한 짐 가득 짊어지고 들어오셨고, 거의 평생을 아침 식사가 끝나면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나가셨다. 하루 종일 햇볕에 탄 까만 얼굴과 울툭불툭 파란 핏줄이 튀어나온 장딴지를 가진, 평생을 논에서 밭에서 몸을 굴리신 우리 아버지. 그렇게 연세가 든 후에는 당연히 주름 투성이 얼굴을 가진 아버지.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사춘기가 지날 무렵부터 ‘왜 우리 아버지는 책이나 TV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근사한 모습이 아닐까, 남의 아버지는 자가용도 타고 양복도 입고 폼 나게 일하시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실까?’ 이런 생각을 했고, 그 후부터는 당연히 아버지가 멋있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내 기억 속의 아버지도 젊었을 때 빛났던 순간이 있었다. 분가해 나올 때 논 한 마지기 없이 숟가락 두 세트와 솥단지만 들고 나오셔서 처음에는 고군분투하셨다고. 위로 오빠 둘, 그리고 나를 낳으실 때까지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일을 하셨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살림을 일구셨다고. 


그런 고생들이 어린 자식에게는 읽히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내 첫 기억 속의 아버지는 멋있었고, 자신감 넘쳤고, 뭐든 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초기에 아버지가 살림을 일구던 그 과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는 논농사와 쌀장사를 같이 하셨다고 한다. 추수철에 이웃 마을 정미소와 계약을 해서 쌀을 사고 그것을 인근 중소도시에 내다 파는 중간급 상인 역할?     


이재에 일찍 눈을 뜬 덕분인지 돈을 많이 모으셨고 전기도, 도시 문명도 늦게 들어온 우리 마을에서 아버지는 단연 선구자였다. 내가 기억하는 첫 모습은 우리 집 마당 안으로 경운기를 운전해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우리 동네에서 경운기를 사서 몰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처음이었고, 그날 운전석의 아버지는 한껏 자랑스러워 보였다. 마루 끝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던 어느 여름날, 3일쯤 뒤 아버지가 TV를 사 오셨고, 제법 오랫동안 우리는 TV를 마루에 둬야 했다. 밤이면 밤마다 우리 집 마당에 평상과 돗자리를 깔아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같이 TV를 보게 했다. 


시골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모기가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 오빠들은 밤마다 마당과 신작로 주위의 검불과 젖은 풀을 끌어모아 마당 두세 군데에 모깃불을 피워야 했고 그래서 오빠들은 심술을 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 그 당시 대히트였던 '전설의 고향'을 우리 집에서 같이 보았을 때였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원혼을 가진 여자 귀신 이야기였을 것 같은데 정상적인 모습으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얼굴을 돌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여자 얼굴이 귀신으로 확 바뀌면서, 화면 가득 허옇게 핏기 없는 얼굴과 입가에 질질 피 흘리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순수하기만 했던 시골 사람들, 평상 위에 가득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TV와 먼 쪽으로 몸을 눕혔고, 그 바람에 쏠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평상 다리가 빠져버렸던 에피소드. 그 밤에 한가로이 평상 아래 배를 깔고 누워 있던 개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던 일이 정말 꿈만 같다.      


또 레슬링이 한창 인기 있을 무렵 어떤 시합에서 우리나라 천규덕 선수인가가 맞고 있던 순간도 기억난다. 하도 천 선수가 반격할 타이밍을 못 찾고 당하고만 있으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외치시길, 자기가 TV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상대편 선수를 확 물어뜯어 주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통하던 그때였다. 그 순간들이 다 기억난다.      


전화기도 우리 집에만 있었다. 거의 3개월 여 동안 모든 외부 사람들이 동네 분과 연락할 일이 있으면 우리 집으로 전화해서 부탁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신나서 먼저 달려가 전화를 받고는 자랑스럽게 부탁의 말을 전하고 오던 우리 형제들도 그 일이 3개월째 반복되었을 때, 부탁받은 그 집까지 가서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이 어쩜 그렇게 귀찮던지, 오빠들과 동생들과 서로 전화받기를 미루며 싸우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아버지가 잘 나가시던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꽤 긴 시간 동안 아버지는 우리 동네의 주류로서 자식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당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아버지도 늙으셨고, 시대에 뒤떨어지셨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부활동을 줄이셨고, 그에 따라 파워도 없어졌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뒷방 늙은이처럼 스스로를 외부와 차단시키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뜻대로 안 되는 모든 것에 대한 노여움과 노년의 무력감, 외로움에 언제나 술을 드셨고, 인생이 왜 이렇게 허망하냐며, 인생의 끝이 원래 이런 거냐며 또 술을 드시고 결국은 우시는 것으로 끝이 나는 되돌이.

 

기분이 좋으실 때는 "시골에서 농사지어, 자식 다섯을 모두 대학 졸업시킨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해라."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시던 아버지와, 자주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아버지는 사실 간극이 너무 컸고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슴 아프고 마음이 쓰라렸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 살기에 바빠서, 내 아이들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바람에 아버지의 그런 외로움을 그냥 지나쳤다. 


아니 오히려 분가한 자식들이 시골집에 내려가면 불러 앉혀놓고는 노년의 쓸쓸함을 말씀하시며 우시는데 나중에는 슬슬 피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듣기 불편한 말인데 오죽할까? 처음에는 심각하게 반응하던 우리도 점점 그러려니 했고, 시골집을 떠나 우리집으로 돌아갈 때는 숙제를 마친 것처럼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휴, 우리 아버지, 또 그러시네. 오늘은 우리 아버지가 술을 너무 많이 잡쉈네~~”   

  

이렇게 눙치면서 우리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옛이야기를 시작하시려는 아버지를 영악하게 외면하게 되었고, '모처럼 집에 갔는데 왜 마음 편히 못 쉬게 하시노?' 어떤 때는 조금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솔직히 그랬다.     


그런 식으로 10여 년이 흘렀고, 나는 나쁜 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그 쓸쓸함을 이해하려 노력한 딸은 아니었다. 그저 착한 딸인 것처럼 연기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임종도 못 지켰다.      


솔직히 그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가실지 몰랐다. 사실 거의 10여 년이나 자리보전을 하셨으면 당연히 어느 순간 돌아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법도 한데, 왜 그랬는지 그런 일은 나에게 안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가신 지 또 10년째. 하지만 정말 웃기는 것이,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버지와 관련된 어떤 장면은 더 선명해지고, 어떤 감정은 더 새록새록 떠올라 내 기분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아버지가 누워 계시기만 하면 다리가 점점 굳어지고 그럴수록 잘 못 걷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억지로라도 밖으로 모시고 나갔어야 했는데 왜 나는 그러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뵈었던 순간이 된 그날, 그날의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떠나지를 않는다. 그날 아버지의 눈은 왜 그렇게 생기가 없었고,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눈길이었을까?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던 그 눈길, 지금 생각하면 분명 그 당시에 느낌이 달랐지만 난 그것에 집중하지 않았었다.


그냥 넘겼다. 그때는 내 삶을 꾸리기에 너무 바빴고, 늙으신 아버지에 주의를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새로 생긴 내 가족 네 식구, 내 일, 이런 것에만 에너지를 마구 쏟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난 “그때의 그 아버지 눈길, 뭔가 달랐던 그 눈길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린 김경호, 기타 줄 위로 눈물을 흩뿌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 김경호를 가수로 성장시키고, 무대를 향해 힘차게 뛰쳐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킨 것처럼, 아버지도 우리 5남매를 각자의 위치에서 사람 구실하고 살도록 키워내셨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시골 동네에서 대학 교육을 다 받은 형제들은 우리 집밖에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쏟으셨다. 아버지의 청춘을 바친 그 노력과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모두는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 김경호나 어른 김경호에게 그처럼 그리운 아버지로 남았고, “한 번만 더 (아버지를) 볼 수 있다면, 눈이 먼다 해도 그 길을 택하고 싶다”라고 한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이 응어리를 없앨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나도 김경호처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것도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이기적 발상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을 모두 바친 자식들을 통해, 당신의 노년이 그렇게 허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 드리고 싶다는 욕심,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고 공감하는 자식들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당신의 인생을 긍정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면서 떠나시게 했으면 하는, 그런 욕심이 있다.      


아버지에 관해 글을 쓰다 보니 진짜로 마음이 울컥해진다. 살아계시는 시아버지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평이하고 일반적인 멘트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내 얕은 글쓰기 재주가 너무 아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