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과 「달콤한 인생」 내 멋대로 엮어 읽기
「춘향전」을 먼저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학창시절에 「춘향전」을 왜 읽었는가? 지고지순한 여인의 정절, 진부한 유교 윤리는 이미 폐기된지 오래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균열, 이 내용은 역사 교과서에서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연애 소설의 모범문, 아이들이 접하기엔 흥미로운 내용이 아니다. 위 세 가지 내용 모두 「춘향전」을 읽을 이유로 훌륭하지만, 학생들을 설득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아주 어릴 때 전래 동화로부터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지겹도록 「춘향전」을 읽어야 할 이유를 꼽자면, 아마도 「춘향전」이 인간이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인문학의 고갱이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8세기 관점으로 「춘향전」을 생각해 본다면 변사또는 더이상 악인이 아니다. 보름마다 한 번 있는 기생점고에서 춘향이는 한양으로 간 남자, 그것도 신분 차이가 많이 나는 양반의 자제와 연을 맺었다며 차라리 죽음으로 대신하겠다고 말한다. 하물며 지금에도 군대에서 점호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탈영으로 간주되는데, 관기였던 춘향의 신분을 생각해본다면 당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유교 이데올로기의 규범을 완벽히 수행하여 장원 급제한 몽룡의 경우를 따져보더라도 그렇다. 몽룡이 암행어사로 다시 남원으로 내려갔을 때, 부패를 저지른 변사또야 차치하고서라도 신분제 질서를 거역한 춘향의 손을 들어준다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럼에도 「춘향전」이 당대에 초대박 흥행 소설이 되었으며, 지금도 교과서에 고전으로 실려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춘향의 인간 선언 때문이다. 당시의 관점으로 여자, 그것도 관에 속해 있는 기생이라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가진다는 건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춘향은 당당하게 말한다. 자신도 욕망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 중에서도 인간다움을 가장 선명히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노라고 말이다. 이 대목까지만 보더라도 높으신 양반 어르신들께서 뒷목잡고 쓰러질 일이겠지만, 춘향은 여기에 더해 신분따윈 상관없다고, 자신은 니들처럼 높으신 몽룡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나도 같은 인간이라고 당돌하게 선언한다.
그렇다면 소설 내에서 춘향만이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몽룡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룡을 알게 된 후로 춘향은 더이상 '기생'이라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김연수가 소설 「스무살」에서 '우리는 스무살이 지나면 스무살 이후가 된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순간 사랑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 소설의 정의가 주인공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소설이라고 한다면, 「춘향전」은 성장 서사를 훌륭하게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몽룡과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자신이 몽룡과 다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모진 시련을 이겨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달콤한 인생」 역시 성장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선우(이병헌)가 희수(신민아)를 만난 이후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선우의 내면 세계를 보여 준다. 말썽이 있다는 호텔 점원의 말에 선우는 지하 깊숙이 내려 간다. 그 과정에서 선우는 종업원에게 쓰레기를 주우라고 말한다. 또한 주방을 지나며 음식을 먹고, 술에 취한 남자를 보며 안 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선우가 지하로 내려가는 과정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결벽증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선우의 성격과 욕망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호텔 전체를 관리하는 지배인으로서의 역할은 모두 보스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모두 선우가 남(보스)을 위해 살고 있다는 영화 설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어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여주는 장면은 2시간짜리 영화를 5분 내로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 시퀀스에서 선우는 보스를 만난다. 보스는 3일동안 자신의 젊은 애인(희수)을 감시하라며, 만약 자신이 의심하는 대로 애인이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면 자기에게 전화하거나, 알아서 처리하라 명령한다. 이때 보스가 선우에게 하는 말이 흥미롭다.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 이 말인즉슨 선우는 사랑한 적이 없으므로 믿을 만하다는 것인데, 어찌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없을 수가 있으랴. 보스는 보는 눈이 틀렸어도 한참을 틀렸다.
선우가 희수를 감시하는 첫째 날, 선우는 보스가 전해 준 스탠드를 희수에게 전해 준다. 영화 내에서 스탠드, 혹은 빛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스탠드는 ‘내가 너를 생각한다’는, 즉 사랑의 메타포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스가 희수를, 선우가 희수를, 희수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스탠드이기 때문이다. 희수는 보스가 선물한 스탠드를 보고 ‘유치하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보스와 희수의 관계가 정의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선우는 그날 밤 희수와 있던 일을 생각하며 스탠드를 깜빡인다.
둘째 날에 선우는 희수에게 전화를 받는다. 혼자 밥 먹기 싫어 선우를 부른 희수는 선우에게 첼로를 들려 준다. 이 장면에서 선우의 뒷 모습을 보여줄 뿐, 영화는 선우의 앞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선우가 희수에게 사랑에 빠졌음을 알 수 있는 힌트를 두 가지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선우가 빛을 배경으로 희수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선우의 뒷 모습 다음 컷으로 나무가 흔들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선우는 보스의 말대로 실제로 젊은 남자와 만나고 있는 희수를 처치하기 위해 희수의 집으로 돌아 간다. 평소의 선우라면 작은 티끌조차 용납하지 않기에 희수를 단숨에 처치했어야 옳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사랑한 이후에 사랑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것을 들켜 슬피 울고 있는 희수의 어깨를 보는 선우도 마찬가지다. 선우는 여기서 ‘기회를 줄게’라는 말로 희수와 젊은 남자의 관계를 없던 일로 하자고 제안한다. 오늘 일은 없던 일이고,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그러나 희수는 말한다. ‘정말 그런 거 아니잖아요, 지워지는 거 아니잖아요.’
이 일만 있었으면 선우의 인생도 그리 엇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찌 그리 간단하던가. 백 사장(황정민)과의 일까지 겹쳐 선우는 삼선교 오무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네 마디면 된다. 잘 못 했 음”
“그 냥 가 라”
선우가 희수에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리하자는 말이 어찌 가능할까. 똑같은 제안을 들은 선우조차도 오무성에게 같은 말로 없던 일로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음 날, 보스는 돌아와 희수에게 간다. ‘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선우는 말과는 달리 희수에게 계속 전화를 건다. 같은 시간에서 희수는 스탠드를 깜빡이며 선우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희수는 보스와 함께 있는데, 보스는 이러한 희수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 선우를 제거하기로 맘 먹는다.
이후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선우가 자신을 다시 찾아 가는 과정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선우가 결벽증에 가까운 자세로 ‘보스’를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보스가 선우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 이후로는 선우가 자신의 새로운 내면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여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보스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선우(이병헌)의 모습도 이를 잘 보여주지만, 민기(진구)와 다시 만나는 장면이 새로 지어지고 있는 건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 이후로 일어나는 일련의 복수 과정이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를 자신의 내면을 새로 세우는 과정이라는 은유로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복수의 시작은 물론 스탠드 선물로부터 시작한다. 앞서 살펴 본 스탠드(빛)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복수의 이유는 희수(사랑하는 사람)라 볼 수 있고, 이는 나아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선우의 여정은 사건이 일어난 경과의 역으로 전개된다. 선우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희수 – 보스 – 문실장 – 백사장 - 오무성’의 순서로 일어났다면, 선우가 복수하는 과정은 이의 역순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우는 오무성, 백사장을 차례로 만나 복수를 시작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우는 자신이 왜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지 아직까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랬어요?”
나아가 백사장에게 복수하고 나서 문실장과 보스를 찾기 전, 호텔 화장실에서 혼자 읊조리는 대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거지?”
선우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이 질문은 결국 보스와 선우의 마지막 대사에서 결론지어진다.
“도대체 뭐 때문에 흔들린 거냐, 그 애 때문이냐?”
이 다음 장면에서 나오는 시퀀스가 대단히 흥미롭다. 대답 대신 유리창에 비친 선우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사랑 앞에서 그 사람을 발견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선우는 ‘남’을 위해 살기보다는 ‘나’를 위해 죽기를 택한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선우는 희수에게 전화를 건다. 말을 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우는 희수를 생각한다. 앞선 시퀀스가 재등장하여 나무는 흔들리고, 비로소 희수의 음악을 듣는 선우의 앞 모습을 보여준다. 웃고 있는 선우. 희수를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닫는다. 선우는 자신의 욕망, 즉 사랑을 긍정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어느 깊은 가을 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A Bittersweet life’라는 모순형용적인 제목은 이 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은 달콤하다. 그 순간에 우리는 선우가 희수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어느 드라마,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달콤하기만 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나를 찾아 가는 일이며, 자신이 그 사람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발견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달콤하지만, 씁쓸한 것. 아름답지만, 아플 수밖에 없는 것.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은 이러한 지점에서 역설적인 사랑의 속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진짜 이유’란 명쾌하게 말한다면 이와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모험가가 될 수도, 복수자가 될 수도, 나아가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상대에게 비추어 자신이 얼마나 헐벗은 존재인지 알게 된 다음에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서’ 노력하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훌륭한 성장 서사를 보면서 ‘사랑하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편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김연수 작가의 질문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스스로 답해 본다. ‘사랑하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인생이 초라해 질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