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라이프(Still Life)'에서 존 메이는 런던 케닝턴 구청 소속 22년 차인 공무원이다. 그는 가족조차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의뢰인의 유품을 단서로 추도문을 작성하고 장례식에 초대할 지인을 찾는 일을 한다.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신의 쓸모를 발견해 줄 단 한 사람이 찾아갑니다."
존 메이는 잊혀 가는 누군가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지만잊혀진 누군가의 장례식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축복 속에서 소중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런데 왜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세월이 지나 가족도 찾지 않는 잊힌 존재가 되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걸까?
영화 <스틸 라이프>의 한 장면
요안나 콘세이요의 <아무개 씨의 수상한 저녁>에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늙고 못생긴 노인이 등장한다. 그의 존재는 '회색빛의 남자'일 뿐이고 그의 이름은 그저 '아무개 씨'일 뿐이다.그는 이따금씩 창문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한다. 그의 일상은 특별한 것이 없다. 오랜 시간 창밖을 보며 지내고 신문을 읽고 수프를 만들어 먹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개 씨의 진짜 일이 시작된다. 아주 중요하면서 비밀스러운 일.
그는 '별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된 조리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이 사실을 아는 밤은 매일 그에게 새로운 별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가 만든 별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천천히 그림들을 다시 보았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일상들 속에서 그는 특별했다. 그의 찻잔에는 뭉게구름이 떠 다니고 먹고 난 수프 그릇에서는 새싹이 돋아나고 빨래한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설거지한 물에서는 꽃들로 가득하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신비롭게도 생명이존재한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이름 석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무개 씨처럼.
우리의 존재가 태어날 때부터 '아무개 씨'로 불리지는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빛내줄 소중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있었고 자신을 좋아해 주고 인정해주는 지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와 타인이 규정해버린 나의 존재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아무개 씨'가 되어 그렇게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다. 아무개 씨가 누군가의 눈에는 무섭고 못생긴 노인에 불과하지만 그는 컴컴한 밤을 환하게 비춰주는 아름다운 별을 만드는 존재였다. 존 메이는 혼자 살며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사랑했지만 새로 부임한 부장에게 그가 하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일 뿐이고해고를 당한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잊혀 간 누군가의 존재를 기억해 준 단 한 사람이었다. 가족과지인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한 많은 사람들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혹여존재만으로도 소중한 '나'를 누군가의 잣대로 잊히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는 별을 만드는 '아무개 씨'일 수도 있고 잊혔진 기억을 되찾아 준 '존 메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존재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별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