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터널>, <신고지라>, <해운대>를 중심으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연출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신 고질라'를 말이다. 안노 감독의 연출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특히 고질라가 도쿄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은 전율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 내부의 관료제를 비판'했다는 세간의 평가는 무색할 정도로 유치하고 조잡했다. 더군다나, 영화가 후반으로 달려갈수록, 오히려 전반부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엎어버리는 서사 구조는 차라리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나는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 <터널>, <해운대>, 그리고 <고질라>를 상호 비교함으로서 재난 영화와 괴수 영화의 사이를 발견해보고, 그곳에서 보이는 윤리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괴수 영화와 재난 영화는 사실상 같은 영화로 보일 때가 많다. <해운대>와 <터널>을 재난 영화로, <괴물>과 <고질라>를 괴수영화로 정의내리더라도, 우리는 네 개의 영화들이 서로 공통적인 서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지의 존재에 의해 공동체의 일상이 무너진다'는 사실 말이다. 여기서 '미지의 존재'는 괴수나 재난의 또 다른 이름이며, '공동체의 일상'은 국가 기관의 대처(혹은 붕괴)나 가족의 생존(혹은 죽음)으로 표현된다. <해운대>는 쓰나미의 습격을 받은 서로 다른 가족들의 생존과 죽음을 다루고, <터널>은 붕괴된 터널 안에 갇힌 하정우와 그를 구하려는 국가의 모습을 다루며, <괴물>은 한강에 나타난 괴물에 대응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신 고질라> 역시 고질라를 퇴치하려는 국가의 대응 방안을 중심 내용으로 내세운다. 여기서 재난 혹은 괴수 영화는 가족의 투쟁을 통해 정서적 울림을, 국가의 대응을 보여주며 사회적 비판의식을 두루 갖추려 한다. 이 둘의 완급조절이 적절히 배치될 경우, 흥행과 평가의 측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제는 흔해진 하나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먼저 성공 사례들부터 살펴보자. 정성일 평론가는 '<괴물>은 정치영화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괴물>은 일차적으로는 CG로 구현된 괴수물이라는 장르적 재미를 충족시켜 주면서, 부족한 기술력과 자본력, 그리고 보편적 서사의 필요성을 현서를 구하려는 박강두 가족의 투쟁을 통해 보충한다. 두 가지 장르적 재미의 기둥을 탄탄히 구축한 후, 그 위에 봉준호는 자신의 정치의식을 올려놓았다. 아래에 내가 <괴물>에 대해 쓴 다른 글을 잠시 인용하겠다.
" <괴물>은 비틀어진 장르영화입니다. 괴수는 영화초반부터 한강변을 대낮에 뛰어다니며 할리우드의 에이리언이 보여주었던 긴장감과는 전혀 다른 충격을 선사합니다. 또한 괴생물체의 분노는 근거 없는 살육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탄생이 가진 부조리(미국의 독극물 방류)를 온 몸에 담은 것 같은 비명과 어리숙함(대표적으로는 첫 등장에서의 미끄러짐)으로 표현되며 관객들로 하여금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괴수들과는 다른 감정, 인상을 갖도록 합니다. 또한 가족들의 병원 탈출 장면은 잠입과 탈출이라는 장르가 가진 긴장감을 영화사에 남을 배경음악과 어딘지 코믹한 배우들의 연기로 둘러쌈으로써 봉준호 감독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괴물>은 한강 다리를 꼬리를 통해 이동하는 괴물의 모습이나 그 입에서 나오는 뼈와 피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영화 안에 구현하면서 괴수 영화의 장르적 공식에서 완전히 탈선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괴물>은 마치 전형적인 괴수장르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장르적 변형을 이끌어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이러한 변형이 일어나는 중심에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블랙 코미디가 의미하는 것은 목소리만 큰 사람들에 대한 냉소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괴물의 정치적인 부분을 보며 함께 생각한다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괴물>은 비틀어진 정치영화입니다. 주권 국가인 한국은 바이러스에 대해 미국의 동의 없이는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며, 방역은 민간업체에게 맡겨 중간착취가 발생하고, 사기업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통신조회를 ‘아무나’에게는 해주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며 미루고, 끝내 미국에게 독극물 방류에 대해 책임을 묻지 못하고 미국은 ‘오해’ 때문이었다는 말을 남기며 괴생물체 사건을 마무리시킵니다. 또한 미국이 바이러스 제거를 목적으로 한강변에 살포하는 화학물질 에이전트 오렌지의 모습이 괴물의 외형과 닮아있는 점과 그것의 이름부터 미국이 월남전에 사용한 생화학 무기 에이전트 옐로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을 볼 때 <괴물>의 시각은 충분히 반미적으로 보일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괴물을 어쭙잖은 반미 사상을 바탕으로 한 괴물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봉준호의 근본적인 사상은 휴머니즘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반미적 요소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휴머니즘은 완전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하고 답답한 점을 토해내듯 말하지만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분노와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봉준호의 휴머니즘의 본질이며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권력과 집단에 대한 조소가 그의 영화 속 블랙 코미디의 본질인 것입니다. (중략) 영화 내내 정부의 방책에 반대하며 영화 후반에는 대규모 집회를 여는 여러 단체들과 시민운동가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그들의 모습과 대사들은 그들을 박강두 가족의 비극을 공감하는 태도가 아닌 그들의 이념과 목적에 맞추어 제멋대로 박강두 가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엉뚱한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결론적으로 봉준호에게 정치적이란 수식어는 진영논리에 매몰된 갇힌 사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존엄성과 본질적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본래 정치적인 영화가 가지는 진영논리의 함정에서 빠져나가며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제약 없이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마음껏 비틀며 만들어낸 영화가 가질 수 있는 틈새를 가족공동체에 대한 긍정을 통해 메워버립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괴물>은 괴수 영화와 가족 영화의 사이에서 정치 영화, 사회 영화로 탈바꿈한다. <괴물>에서 괴수, 가족, 국가는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과정에서 단 한 순간도 누구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은 채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인과 관계,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굉장히 훌륭한 이야기 구조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기교이다.
<터널> 또한 <괴물>보다는 부족하지만 좋은 예시이다. <터널>은 붕괴된 터널에서의 생존이라는 생존 장르의 재미를 한 축으로, 그리고 가족과의 정서적 관계와 국가의 구조를 다른 한 축으로 세워 이야기를 진행한다. 다만, <괴물>과는 달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영화의 이야기를 추동하는 장르적 재미에 너무 가깝게 배치한 나머지, 가끔씩은 대사나 상황이 작위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나열해보자. 우선, 김은숙 씨가 연기한 '장관'은 누가보더라도 박근혜를 은유한 것인데, 너무 대놓고 멍청한 인물로 설정을 하여 역설적으로 그 인물이 허구적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하정우와 같이 갇힌 인물이 '취업 준비생 여성'인 점과 그녀의 (예정된) 죽음. 그리고 부조리한 관료제 안에서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사투하는 오달수의 배치는 기존의 장르의 타성에 깊이 젖은 나머지 그것이 만들어 내려는 사회적 의미마저도 상투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하정우의 '생존' 이야기에서 장르적 재미가 다소 부족하여, 극장을 찾은 몇몇 관객들에게는 이것이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재난에 대응하는 국가 관료제의 헛점을 정확히, 그러면서 면밀히 탐구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두 기둥이 다소 탄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가 <괴물>을 보고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터널>을 보고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여기에서 차이점이 생긴다. <괴물>은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의 형식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삶.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을?'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반면, <터널은> '~해야 한다. ~하기 때문이다'는 다소 상투적인 문법을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터널>이 좋은 영화일 수 있는 부분은 배두나의 이야기에 있다. 배두나는 기존의 재난 영화, 괴수 영화에서 고정되어 있던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난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이 영화는 재난 영화의 타성에 빠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위해 인서트 되는 표정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재난의 상황을 살아가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상황에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에 맞추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우리의 비극을 몸으로 체험하는 주체 말이다. 그 끝에서 "죽은 네 남편을 구하려다 산 내 남편이 죽었다"는 또 다른 피해자의 절규를 맞이할 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지 되묻게 되고, 이것은 <터널>이 윤리적일 수 있는 하나의 희망이 된다. 비록 <터널>에는 기둥 위에 올라선 지붕은 없지만, 최소한 그 기둥은 고고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해운대>가 어떤지 살펴보자.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영화 포스터에 모두 나와있다. 영도 다리를 덮치는 쓰나미와 그 위의 비장한 표정의 가족들. 이 영화는 재난을 '스펙타클화'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스포츠 영화다. 관객들이 극장에서 즐기는 것은 거대한 쓰나미가 건물을 부수고, 사람들을 도망치게 하는 것이며 이는 '고질라'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재난은 생물이 아니기에, 우리는 쓰나미 그 자체가 아니라 쓰나미에 도망다니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쾌락을 느낀다. 하지만 그 쾌락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쾌락이기에, 영화는 자연스럽게 가족서사를 동원한다. 즉, 영화의 스펙타클을 한 없이 즐긴 이후, 가족 서사에 이입하여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동안의 비도덕적인 쾌락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운대>에는 두 축이 없다. 지붕을 떠받칠 두 축은 "쓰나미"라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장르적 쾌감에 이미 쓸려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해운대>는 비윤리적인 재난(혹은 괴수) 영화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마루타 부대의 인체 실험 영상이 예술일 수 없는 (나는 최소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것처럼, 해운대는 예술일 수 없다. 차라리 일본의 마루타 부대의 영상이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추어진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면, <해운대>는 유치한 가족주의로 관객들에게 면죄부를 주려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다.
그렇다면 <신 고질라>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해운대>가 자기자신의 스펙타클에 못 이겨 휩쓸려버린 영화라면, <신 고질라>는 자기자신의 스펙타클이 자해를 가한 경우다. <신 고질라>는 '고질라'라는 괴수의 쾌락, 일본군 자위대의 활약, 전쟁의 (철저한 일본 입장의) 피해자성, 국제 사회에 대한 견제, 일본시민의 시민의식, 괴짜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소년만화'식 전개, 이 모두를 담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것 하나도 성공하지 못한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패도 정치'로, 일본을 '왕도 정치'로 호명하면서, 정작 총리가 "수많은 책임을"지는 모습을 타국의 대사 앞에서 머리 숙이는 (심지어 직원들까지 전부 "도게자" 시키는) 행위를 인서트함으로써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스스로를 비웃는 초메타적인 영화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장면들이 있다. 이를테면, 미국을 일본을 지배하려는 악의 축으로 상정하면서, 정작 일본이 국제적 협력을 요청하자 독일이 이를 받아주는 장면. 또, 고질라의 첫등장에서 공격의 기회를 놓친 이유가 달아나는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최종 공격의 상황에서는 인근 주민의 방사성 피폭을 감안하고 작업을 진행하는 장면. 이 두 장면은 의도한 것이라면 지극히 비윤리적이고, 의도하지 않았다면 무식한 것이다. 이야기가 연결되지 못한 채 산란되자, 친절과 배려 뒤에 감추어졌던 '전후 일본'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윤리를 말하는 것이 쓸모 없어진 세상에서, 그리고 사실 윤리에 관한 담론이 구시대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윤리를 '영화'로 말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명확이 '이거다!'라고 말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자격 또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적어도 영화를 지탱하는 축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축을 단단히 세울 수 있을 때에만 그것에 대한 사고를 통해 윤리에 대한 탐구를 이어갈 수 있다. 이 말은 결국, '일단 잘 만들어야 한다'는 한 마디와 다를 바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란, 어쩌면 직업윤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