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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Jan 08. 2023

회색인, 최인훈의 '개인' 찾기

최인훈의 불교적 모나드론에 관하여

 최인훈은 해방 이후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문제적 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광장>은 이데올로기 갈등을 다루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되었다. 그러나 최인훈의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면, 이데올로기는 그의 작품 세계의 한 측면을 드러낼 뿐이다. 그렇다면 최인훈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문제의식은 "한국에서 근대적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최인훈의 작품을 탐독하면 할수록, 그의 관심사는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서양의 발명품인 '근대적 개인'으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느꼈다. 따라서 최인훈의 몇몇 작품들에 관한 감상을 남김으로써 최인훈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표현하였고, 그의 해결방안은 무엇이었는지 엿보고자 한다.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장으로 끝난다. 만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월북한 아버지와 분리되어 남한에서 살아가다가, 월북하여 전쟁을 경험하고, 중립국을 선택하여 망명을 선택하는 이명준의 삶은 한국 근대사가 겪은 모순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명준의 실종을 자살로 해석하며 <광장>의 가치를 조명하려 했다.  

 

 명준의 실종을 자살로 보며 <광장>의 가치를 조명하는 첫 번째 관점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광장>을 읽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을 주장하는 대표 주자로는 염무웅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상황과 자아’라는 글에서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을 비판함으로써 독자가 무언가를 얻는다는 점에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명준의 자살은 명준이라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부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광장>의 가치는 그동안의 문학적 터부를 깨고 개인주의의 정초를 국가라는 관점에서 본 사회비판적 정신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명준의 자살을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을 넘어, 근대적 개인의 관점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정과리가 이러한 입장에 속한다. 정과리는 이명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을 확신하는 것’ 임을 지적한다. 특히, 친구였던 태식을 고민하는 장면에 주목하여 그의 악행을 ‘학습을 몸이 따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과잉행동’으로 규정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이명준의 실패를 통해 자아와 세계를 향한 열망과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아이러니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김현이 지적한 것처럼, 명준이 자살하기 전 쳐다보는 갈매기들이 초판에서는 윤애와 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개정판에서는 은혜와 그들의 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명준이 자신의 긴 삶의 끝에서 결국 은혜와 그들의 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는 욕망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타자와의 합일, 소통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준이 자살을 한 것이라면, 이러한 소통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들과 합일하려 했다는 해석이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즉, 명준의 정말로 자살한 것이 된다면, 그것은 한국 땅에서는 현실적인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명준의 자살을 ‘은유적’ 자살로 본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그의 실종을 다른 세계로의 이동으로 본다면 어떨까? 

 

 이러한 탐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광장>의 이명준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그가 추구한 것이 어떠한 종류의 사랑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가 최초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윤애이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깝다. 김현이 ‘헤겔주의자의 고백’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최인훈의 인물들은 정신적으로는 책으로, 육체적으로는 여자로 도망치는 것이다. 이러한 이명준의 태도는 윤애를 향해 “‘사랑’이라는 말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윤애를 만나기 전, 이명준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다. 이것은 이명준이 밀실에서 구축한 세계가 외부적 힘에 의해 힘없이 쓰러지는 모래성임을 드러내는 계기였던 것이다. 월북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로는 남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인식과, 윤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이라는 희망이 그로 하여금 윤애를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명준과 윤애가 대화를 나누어 갈수록, 이명준는 윤애가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는 윤애와 몇 마디의 잡담을 나눈 후 “주여, 이 깡통을 용서하소서.”라고 말하고,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윤애를 보며 “본인에게는 아무리 벅찬 넋두리라도, 남의 귀에는 유행가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즉, 이명준에게 윤애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보다 수준 낮은 인간으로 재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명준은 윤애를 떠나지 않는가. 간단하게 생각했을 때 명준은 윤애의 몸을 원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윤애와 몸을 섞은 후 명준은 “불안한 생각이 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명준은 윤애와의 육체적 관계에서 쾌락보다 불안을 더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배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온다. 겉으로만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모양을 한 살을 안았대서 어떻게 될 외로움이 아니다.”라는 명준의 말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불안이 극에 달한 명준이 내뱉는 대사가 윤애에게 “알몸으로 믿어줘.”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즉, 이명준에게 사랑은 타자와의 소통, 혹은 타자를 위한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타인과의 ‘사랑’이라기보다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을 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명준은 북한에서 모성애의 현실태를 만난다. 그녀가 바로 은혜이다. 그런데, 이명준이 은혜에게 벅찬 감정을 느끼는 순간도 윤애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즉, 형사로부터의 고문이 윤애의 집으로 향하는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면, 북한에서 당한 자아비판이 은혜의 다리를 보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찬사를 낳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명준은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즉, 그가 <광장>이라는 소설 속에서 상당 부분을 내적 독백, 혹은 시대 상황에 대한 장광설을 펼치지만, 과연 그것이 이명준의 진의인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완전히 충족시켜 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명준에게 은혜는 그야말로 천사였을 것이다. 그녀는 명준의 말을 거부하지 않으며, 명준은 그런 은혜를 상대로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진다. “내가 반동분자라두?”와 같은 질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명준의 내면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의식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은혜는 끝없는 명준의 추궁에 견디지 못하고, 명준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명준의 반응이다.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명준은 윤애와 은혜를 회상한다. 여기서 명준은 “그녀를 믿었지.”와 “그녀도 나를 속였어.”라는 말로 자신과 윤애, 은혜의 관계를 평가한다. 그런데 정작 윤애와 은혜를 믿지 못한 것은 명준 본인이며, 오히려 그녀들을 속이고 사랑의 이름으로 곁에 있었던 것은 명준임을 감안할 때 이는 퍽 우스운 자기기만이 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태식을 고문하고 난 후 윤애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이러한 과잉행동은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타인과 어떻게든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의 잘못된 분출에 가깝다. “너는 악마도 될 수 없다?”라는 명준의 말은 그러한 과잉 행동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타자와의 소통,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최인훈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최인훈은 명준이 낙동강 전선에서 다시 은혜를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준은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 은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행동한다. 이를테면, 용서해달라는 윤애와 은혜의 말을 평가하는 장면이 그렇다. 명준은 윤애는 악마에게 빌붙는 천사이고, 은혜는 죄지은 여자의 그것이라고 평가한다. 윤애에 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은혜가 죄를 지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은 소설 어디에도 없다. 은혜가 명준을 떠난 것은 명준의 의처증에 가까운 집착 때문이지 은혜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최인훈은 명준을 통해 은혜를 죄지은 여자로 묘사하고 있고, 은혜가 자신이 너무했다며 스스로를 탓하도록 한다. 


 최인훈은 광장과 밀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랑을 상정했다.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각각 타인이지만 동시에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명준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최인훈이 <광장>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사랑이라는 광장의 밀실’은 너무나 작위적이며, 일방적이다. 최인훈의 사랑에는 소통이 없다. 따라서 명준이 만약 실제로 자살한다면, 이는 자폐적인 사랑의 종말로 읽힐 여지가 있다. 따라서 명준의 ‘실종’이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든 이명준이 타자와 소통을 이뤄내는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 


 그것이 <구운몽>에서 최인훈이 이명준을 독고민으로 살려낸 이유이다. 그는 죽음의 직전, 관을 박차고 다시 세계로 나온다. 그는 사랑을 ‘이곳’에서 ‘어떻게든’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공간에서 ‘외부의 세력’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그 후 그는 결국 주체성을 상실한 채 자신을 움직이는 외부의 힘에 몸을 맡기고, 이러한 그는 객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하지만 최인훈은 하나의 단서를 남겨두는데, 그것은 시간을 먼 미래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곳에서야 독고민은 그가 기다리던 그녀와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입맞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사랑은 궁극적이고 영원하게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먼 미래에서 과거의 한국을 회상하며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즉, 이명준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해방 이후 근대 한국’에서는 이러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읽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운몽>의 결말은 이명준의 실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최인훈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회색인>이다.  


  <회색인>은 4.19 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에 집필되었다. 그런데 <회색인>이 다루고 있는 시점은 4.19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이것은 <광장>이 4.19로부터 탄생했다면, <회색인>은 그 실패를 반추하기 위해 그보다 더 전으로 돌아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찾아보려는 최인훈의 문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김주연이 ‘분단시대와 지식인의 사랑’에서 지적한 것처럼, <회색인>은 소설이라기보다 하나의 논문에 가깝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 독고준은 사회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에서 모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이 서양처럼 발전하지 못한 것을 열등감으로 가지고 있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월남 이후 가족 관계가 끊어지며 자아를 유지할 방편이 없다는 것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준이 이상의 실패를 몸으로 겪으며 낙담한 것과는 달리, 독고준은 남한에서 이미 낙담을 한 상태, 즉 비관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상태에 빠져있다. 그는 한국의 문제의식에 대해 김학과 이야기하면서도, 변화는 불가능하며 다만 ‘사랑과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독고준의 문제는 그 사랑의 대상을 누구, 혹은 어떤 것으로 해야 하며, 사랑을 위한 시간은 얼마 정도가 적당한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이는 <구운몽>의 마지막 장면의 키스가 ‘지금, 여기’의 한국에서는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이명준이 도피적 독서를 통해 철학적 탐구에 몰두하며 세상의 근원을 탐구한 것과는 달리, 독고준은 도피적 독서를 통해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플란다스의 개>를 읽으며 삶의 이상향을 꿈꾸고, 심지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인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읽으면서도 주인공들의 쾌활한 삶에 감동받는다. 이를 통해 유년기의 독고준은 명준과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소설처럼 사는 것’, 즉 이상적인 개인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굳이 나갈 필요 없는 학교 보수 공사에 자원하러 나가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도, 그것이 그에게는 이상적 세계를 향한 도야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소년 독고준이 마주한 것은 미군의 폭격이었다. 그렇게 독고준의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도야는 실패로 끝나는 것 같았으나, 거기서 그는 다른 것을 얻어 온다. 폭격기가 날아오자 어디선가 나타나 그를 방공호 안으로 이끈 여인 말이다. 이 여인은 독고준에게 “독서를 통해서 눈부시게 다채로운 현상의 저편에서 울리는 생명의 원 리듬, 혹은 원 데생”을 직접 경험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독고준에게는 이명준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여성이 나타난다. 한 명은 종말론적 기독교 신자 김순임이고, 다른 한 명은 미국에 살다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경이다. 먼저 김순임의 경우, 그는 은혜와 같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독고준에게 호의적이며, 김학의 입을 통해 전해 듣자면, 독고준에게 호감까지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회색인>에서 독고준에 대한 김순임의 내면묘사에는 “그를 구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존재한다고 적혀있다. 즉, 그녀는 말 그대로 ‘은혜’ 그 자체인 것이다. 명준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은혜를 끝에서야 발견한 것과 달리, 독고준은 이유경보다 먼저 김순임을 만난다. 그리고 독고준은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주려고 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끝내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명준과 은혜에 대한 최인훈의 반성적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명준과 은혜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준과 순임 역시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다.”라는 그의 선언은 독고준이 이명준의 폐쇄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타자와 소통 가능하면서 살아가는 자아를 형성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독고준은 타인에 의해 자신이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고준은 남한 사회에서 가족이 없는 자유란 곧 절대적인 고독임을 깨닫는다. 이는 그의 일기장에 적힌 ‘모나드’라는 표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모나드는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제안한 개념으로, 창이 닫힌 채 주변과 관계하지 못하고,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매우 작은 입자를 의미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모나드들로 우주가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인과를 가지지 못하는 세계가 마치 인과율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이유는 신이 모나드들의 움직임을 예정조화를 통해 지정해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서 추측해 보자면, 독고준은 남한 사회에서 모나드로서 존재하고 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창이 없는 모나드인 독고준의 창문에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 또한 모나드를 통한 문학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고준은 이러한 자신을 드라큘라에 비교한다. 영화 속의 드라큘라는 선의의 그를 도와준 여자를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희생자들은 드라큘라가 된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드라큘라를 동정한다. 하지만 이명준은 “너는 악마도 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독고준은 자신이 드라큘라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순임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드라큘라는 진정한 사랑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유경은 어떤가? 그녀는 독고준보다 고등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람이다. 독고준은 자신이 그녀를 놀리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이유경은 어린 동생을 놀아주듯 독고준을 대한다. 즉, 독고준이 김순임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듯, 이유경 또한 독고준을 자신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독고준은 이러한 이유경에게 짓궂은 말을 하며 겉으로는 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 감화를 받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독고준이 2층의 자기 방에서 내려와 1층의 이유경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설의 마지막을 ‘감성(김순임)이 아니라 지성(이유경)을 선택한 것이며, 이는 독고준이 이유경에게 느낀 지적 동류의식 덕분이고, 이는 최인훈이 앞으로 정신적 투쟁을 진행할 것’이라는 김치수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즉, 이유경의 방에서 행해지는 대화에 따라 독고준이 모나드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타자와의 소통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색인>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기>는 독고준이 이유경의 방에서 나오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독고준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게 된다. 그는 마침내 고향에 도착한 오디세우스와 같이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것일까? 하지만 <서유기>는 독고준을 꿈속 여정으로 이끈다. 그리고 여정 속에서 독고준은 논개부터 이광수까지 한국의 고대 인물들을 만나며 또 다른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는 이유경의 방문을 연 것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독고준의 행동으로 볼 수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성취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여기서 우리는 최인훈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한국에 대한 열등감이다. 이는 다른 자료를 인용할 것도 없이 <회색인>의 초반부의 독고준의 장광설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요약하자면, 한국은 고유한 문화를 쌓지 못하였으며, 기껏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패배를 웃음으로 승화하는 예술이기에, 이는 사회를 변혁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은 패배한 종족이야.”라는 독고준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어에 대한 갈등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병욱이 ‘다시 읽는 <광장>’에서 광장의 개작에 대해 지적하며, 최인훈이 3년의 미국 생활을 끝낸 후, 한자를 전부 한글로 바꾼 이유에는 내용과 표기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좁히려는 것에 있다고 지적한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표음문자인 한글과 표의문자인 한자가 합쳐진 ‘한국 문학’이라는 형식 자체가 타자와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닌지 질문하는 것이다. 뜻과 모양이 따로 노는 문학, 소리와 의미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문학, 이러한 문학의 형식이 타자와의 소통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따라서 이태동이 ‘학문의 인식 작용과 야누스의 얼굴’에서 지적한 것처럼 최인훈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와 인식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었고, 따라서 희곡으로 장르를 변경한 그의 선택은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는 최인훈의 희곡에는 대사가 많지 않으며, 심지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서는 심각할 정도로 말을 더듬거리는 화자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즉, 최인훈은 더 이상 텍스트를 통한 내적 독백이나 타자와의 대화는 궁극적 소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무대 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음성이 그것이 될 수 있다는 사상적 전환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희곡에서 타자와의 소통을 어떻게 시도하였고, 그런 시도는 성공하였는가? 이를 위해 필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둥둥 낙랑둥>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한국의 전통 신화를 차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독고준이 한국에는 신화가 없다고 푸념한 것에 대한 최인훈의 전면적인 반박이라고 볼 여지를 충분히 남겨둔다. 이태동은 이러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데, 그는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 나오는 용마의 울음소리를 내세에 대한 인식론적인 비전과 환상을 음향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둥둥 낙랑둥>은 호동이라는 서사적 현실과 낙랑공주라는 환상적인 꿈을 날줄과 씨줄로 만들어 엮으며 현실세계와 이상 세계의 거리를 좁히고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둥둥 낙랑둥>의 경우, 각각 <신약성경>과 <햄릿>을 한국적으로 재구성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심지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경우에 최인훈은 작가 노트를 통하여 이 작품의 예수의 생애와 관련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는 <회색인>에서 독고준이 이유경을 향해 “<춘향전>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반박을 수행하려는 것인가? 즉, 위의 두 작품은 한국 문화의 신화가 서양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인가? 그런데,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극의 마지막에서 결국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이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바라보며 다시는 땅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훠어이 훠이”라고 소리치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이라는 곳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고, 이는 결국 위에서 인용한 독고준의 말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즉, 한국적 신화를 통해 서양의 문화적 유산을 극복하기보다, 한국은 서양과 같은 문화적 유산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극단적 냉소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둥둥 낙랑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는 자아와 삶에 대해 개인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근대적 개인의 맹아를 품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가 만나는 방식은 왕비를 통한 환상을 통해서이다. 이는 왕비가 국가의 무녀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강조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할 때,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호동 왕자가 고구려의 북이 아닌 낙랑의 북을 찢는 것은 근대적 개인의 주체성 선택이 아니라 환상과 꿈을 매개로 실행되는 ‘신들림’에 가깝다. 따라서 <옛날 옛적의 훠어이 훠이>와 <둥둥 낙랑둥>은 한국적 문화와 서양적 문화의 융합이라는 점에서는 가치를 지니나, 이것은 우리가 최초로 던졌던 질문, 즉 ”명준의 사랑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이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어디서 무엇이 되려 만나랴>의 경우, 온달과 평강공주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은 온달이 꿈속에서 상제의 딸에게 필요한 나무를 베었고, 상제의 딸이 평강공주로 환생하여 온달과 만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극의 끝에서, 온달은 평강공주가 상제의 딸임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평강공주를 도와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평강공주는 자신이 온달의 ‘진짜 마음’을 몰랐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이는 자립적인 개인이 서로의 진심을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법칙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이어지고 풀어진다는 점에서 불교적 사상의 채취를 풍긴다. 평강 공주 또한 지속적으로 ‘부모미생전’이라는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최인훈의 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회색인>에 등장하였던 황 선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 선생은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는 김학에게 서양에는 기독교가 있다면 동양에는 불교가 있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최인훈은 황 선생의 발언에 1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를 할애하는데, 이는 단순히 황 선생이 서사적 장치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최인훈 스스로도 이러한 인식을 깊게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명준의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최인훈의 대답을 유추해 보자. 나는 이것을 ‘불교적 예정조화’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즉, 최인훈은 결국 근대적 개인으로서 개인과 개인이 마주 보는 사건을 창조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불교라는 동양 사상을 바탕으로 ‘인연’을 통한 만남과 헤어짐으로 관심사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회색인>에서의 ‘모나드’ 개념과 연결된 것이다. 즉, 최인훈의 후기 작품들인 희곡에서 인물들은 근대적 인물의 원형, 혹은 근대적 인물로의 맹아를 품고 있지 않을뿐더러, ‘인연’이라는 동양의 신의 예정조화에 따라 움직이는 모나드 상태로 굳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명준의 실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인훈은 <광장>의 이명준을 통해 한국적인 근대적 자아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의 한국적 근대적 자아는 탄생된 바로 직후부터 타자와의 소통의 문제와 마주하였다. <광장>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이것에 있다. 즉, 단순히 근대적인 ‘나’를 탄생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근대적인 ‘우리’를 상상했다는 점 말이다. 따라서 최인훈은 명준을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고 ‘실종’시킴으로써 어떻게든 그에게 타자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이는 모나드가 창을 부수고 뛰쳐나와, 타자와 악수를 할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최인훈은 끝내 이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귀소본능을 지닌 새처럼 다시 모나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이 최인훈, 더 나아가 한국 문학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최인훈을 더욱 열심히 읽어야 할 이유가 된다. 그가 타자와 만나기 위해 걸어왔던 길을 다시 밟으며, 그가 미처 찾지 못했던 또 다른 길을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구운몽>을 살짝 변형하자면, “우리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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