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시대다. 현재 한국에서는 중국의 야만성, 독재성, 패권성 등을 거론하며 부정적인 여론이 일색이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생산력 있는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쪽 자료를 찾아보자니, 왜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높아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정치적 레토릭들만이 공허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 관한 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을 읽으면서 였다. '일대일로'가 단순히 중국식 국가 발전 모델의 일환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유라시아적 질서로의 복귀라는 화두를 새롭게 제시하고, 우리에게 잊힌 냉전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중국의 굴기를 새롭게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었다. 다만, 그의 글에 때로는 일반적 공리의 수준을 넘어선 편향된 주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중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양 극단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공상철 교수의 [코끼리에게 말을 거는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중국의 현대사를 단순히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 혹은 냉전 시대의 산물로 해석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그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며 세계의 국가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는지를 중점으로 바라보았다.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내가 중국 담론에 대해 찾아보며 느낀 '전문가'에 대한 인상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흔히 정치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러한 생각에 완고하게 반대한다. 전문가는 말 그대로 하나의 분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열정, 혹은 끈기, 그리고 업적에는 두말할 것 없이 깊은 찬사를 주어야 하겠으나, 가장 위험한 사람은 하나의 책만 읽은 사람이라는 경구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발생하는데, 위대한 전문가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는 충분히 '편향'되어 있어야 한다. 전문가라는 전문직에 편향이라는 경사로까지 갖추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의 다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그 '편향'을 감수하고, 또 그것을 새롭게 조정하면서 현재를 재해석하는 것은 오롯한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 또한 그렇게 읽었다.
모습 1. 천안문 광장.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중국은 식민지 국가 중 민족 해방 전쟁으로 건국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였다. 동시에, 그 전쟁이 세계 전쟁이었기에, 세계 전쟁 후 국제적 질서의 개편 속에서 그 역학 관계를 파악하여 국가 체제를 구성할 필요성이 있었다. 굳이 이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이유는 우리가 중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흔히, 그리고 크게 저지르는 실수인 "중국은 공산주의냐/사회주의냐/자본주의냐/왕조냐?"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은 그 역사적 탄생의 배경에서부터 이런 식의 논의를 단호히 거절한다. 비록 공산당이 내건 문구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었을지언정, 당시 중국의 국내외적 배경은 특정 사상의 실현을 독려하기보다는, 세계 질서 내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공간에 가까웠다. 건국 후 공산당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 질서에서 중국의 위치를 잘 조정하여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도록 하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마오쩌둥의 초기 국가 구상이다. 마오쩌둥은 건국 이후 농촌과 도시의 상생을 통한 민족 자본 확보를 급선무로 보았다. 그는 이것을 '신민주주의'라고 불렀는데, "민족 부르주아와 함께 분투해야 한다"는 말까지 사용하며 민족 자본 육성에 힘썼다. 저자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의 초기 구상은 소련에 편입되어 냉전 체계에 들어가기보다, 중립적인 자세로 민족자본주의의 길을 가려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마르크스 역시 공산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통해 자신의 생산력을 극도로 고도화시킨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이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매도하는 것은 힘들다고 본다. 당시 중국의 90%는 농촌이었고, 그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배경을 고려한다면 더욱더 말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초기 구상과는 달리 중국은 민족 자본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고, 결국 소련으로부터 외채를 받으며 냉전 체제에 편입되는 선택을 한다. 이후 중국이 자생적 민족자본주의의 길을 포기하고 냉전 세계로 편입되었다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6.25 전쟁이다. 이후 1953년. 중국은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5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소련으로부터의 외채를 바탕으로 국가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했음을 뜻한다. 자본주의 공상업을 국가 자본주의 제도에 올림으로서 사회주의로의 발전을 위한 기초 건립 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국가의 계획이 계획대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국 역시 냉전 구도 속으로 편입됨에 따라 본인들의 구상과는 다른 선택을 연속하여 진행해야 했다. 그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부 조직 및 생산관계의 소련화, 도시와 농촌 간의 차이 심화, 소련의 원조 중단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을 하나로 꿰뚫어주는 핵심이 있다면 그것은 '외채'이다. 외채는 다른 말로 해서 그냥 빚인데, 중국은 이 '빚' 때문에 본인들의 구상을 폐기하고, 수정해야 했다. 소련은 당시 중공업 위주의 국가 자본주의 단계를 이행 중이었고, 당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관료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외채를 빌린 중국으로서는 소련의 발전 모델을 배우게 되었고, 그 결과 점차 '소련화'되어 갔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국가의 하부구조(경제적 환경)가 상부구조(사회, 정치, 철학)를 구성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 한 마오쩌둥의 수단이 '대약진 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은 결국 '자력 강생'이다. 소련의 원조 없이 농업 및 철강 부분에서 생산력을 증대시켜 중국식 사회주의를 이어나가겠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단순히 대약진 운동을 '사회주의적 광기', '저 새는 나쁜 새다'라는 정치적 문구로 전환하여 독해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라고 본다. 물론, 대약진 운동은 본래부터 모순이 있었고, 당시 중국의 부패한 관료 체계 및 과한 우상화로 인해 피해가 더욱 커진 실패한 운동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특정 역사적 사건의 일부를 발췌하여 정신 자위용으로 쓰기보다는, 그 운동의 정확한 원인과 배경을 알고, 그것이 중국의 현대에는 어떻게 소환되고, 이용되는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약진 운동은 중국에 무엇을 남겼는가? 대약진 운동 이후 중국은 GDP -27.3%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국가를 파산 직전으로 내몬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판단은 농업과 공업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 핵 개발을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동냥을 하려 해도, 개를 팰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마오쩌둥의 문구는 당시의 중국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은 계획대로 핵 개발에 성공하여 국제적 발언권을 획득하지만, 농업과 공업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본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소련이 중국의 핵 개발을 견제하는 상황까지 오자, 중국은 새로운 선택을 내려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닉슨의 중국 방문이 성사된 것이다.
모습 2. 중난하이. 리처드 닉슨. 마오쩌둥과 만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중국의 선택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시점에서 각도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질문은 닉슨의 중국 방문일 것이다. 리처드 닉슨은 전형적인 냉전 시대의 미국인이다. 자유 세계의 리더를 자처하며 철저한 반공 정책을 펴던 닉슨은 어떤 연유로 중국을 방문하게 된 것일까? 이를 닉슨 개인의 리더십이나, '냉전 종식'이라는 상투적인 문구로 표현하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다.
조금 거시적인 관점에서, 저자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배경으로 설명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2번의 세게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게 경제 질서를 말한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의 특징으로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채택하고, 금본위제를 사용한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금본위제는 달러가 세게의 기준 화폐로 쓰이는 만큼, 달러와 금의 가치를 고정적으로 설정하여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자본주의는 50~70년까지 황금기를 맞는다. 하지만 호황으로 인해 외국의 달러 보유량이 높아지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달러를 더 찍어내며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자 달러의 가치에 대한 각국의 의심이 커져가며 체제의 균열을 가속화한다.
각국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는데, 실제로 닉슨은 미국은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줄만큼 금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닉슨 쇼크'를 일으킨다. 이 사건 이후 세계의 자본 질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는 자본의 금융화와 국제 분업이었다. 금융이란 투자와 수익 배당을 두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데, 선진국은 금융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더 이상 고 생산력을 가지지 못하는 산업들을 개발도상국으로 이전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어떻게 중국의 개혁/개방과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답은 자본주의의 특성에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특징으로 '순환성'을 지적했다. 자본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자기 증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과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바라보면, 미국의 중국 방문과 데탕트 현상은 냉전 체제의 종식, 혹은 특정 체제의 우위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세계의 자기 조절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모습 3. 천안문 광장. 덩샤오핑. 천안문 운동을 진압하다.
덩샤오핑의 등장은 이러한 세계적 질서의 움직임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국으로부터의 외채와 중국-베트남 전쟁의 비용을 합쳐 200억 원의 국가 부채를 감당해야 했고,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시점에서 인민들과 당 간부들에게 '중국식 사회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해야 했다. 이러한 형국에서 덩샤오핑이 내린 결정은 다음과 같다.
덩샤오핑은 그동안 중국 경제의 생산관계이던 '인민공사'를 해체한다. 인민공사는 사회주의적 경제 시스템인데, 쉽게 말하게 농촌에서는 집단생산/집단 분배를 도시에서는 집단경영/집단생산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 시스템이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국가 재건을 위해 몇 가지 조치를 단행한다. 그중 첫 번째가 '가족 생산 청부제'이다. 중국 사회에서 토지는 중요하다. 농업인이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상, 토지 정책은 국가의 근본 정책이며, 도시에서의 중공업 투자를 위한 비용을 분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덩샤오핑은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가지지만, 생산물을 개인이 소유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즉, 소유자, 조세자, 생산자가 각각 다른 중국식 토지 정책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기업들에게도 자율권을 주고 세금을 걷는 형식으로 제도를 개편했으며,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의 재정권을 분리시켜 국가 재정의 위기를 완화했다(라고 쓰고 지방 정부로 떠넘겼다고 읽는다). 이러한 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적 질서를 상당 부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보는 서서구사회의 관점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경제는 자본주의화하면서 정치권력만 당이 독재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여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또한 차관으로 인한 상부구조의 변화로 볼 것을 요청한다. 소련에게 외채를 빌렸을 때 정치/경제 구조가 소련화 되었던 것처럼, 미국과 서방으로부터의 외채가 많이 들어온 당시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서방 세게의 상부구조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국가를 운영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한 국가의 판단과 행위, 그리고 결과는 항상 독립적이지 않으며, 의도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국가적 특색을 가질 뿐이다. 우리나라 역시 식민지-해방-군사독재-민주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의도와 결정, 그리고 결과가 맞아떨어진 적은 찾기 쉽지 않다. 거시적 세계 질서와 미시적 역사 사건들이 종합되면서 '국가의 정체성'을 희미하게 유지하고, 그 기틀을 유지할 수 있는 한에서 발전을 꿈꾸는 것. 그것이 냉전 이후 아시아 세계들이 보여준 생존 방식이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천안문 운동은 일종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국은 미국 외채 -군사 독재 -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똑같은 과정을 거친 중국은 민주화가 아닌 공산당 일당독재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보였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중산층의 증가로 정치적 의식이 성장하여 민주화를 요구하였다'는 관점으로'만' 설명하기는 힘들다. 여기까지만 말하는 것은 서구 자본의 상부구조 변혁 '요구'까지만 말하는 것과 같다. 진정으로 그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응답' 또한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지정학적 위치, 국민적 성향 등이 민주화로의 방향을 더 선호한 반면, 중국의 경우 공산당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천안문 운동은 서구 자본의 상부구조 변혁 요구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응답이자, 자기 조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시대에 요구에 덩샤오핑은 이렇게 '중국식 사회주의'에 대해 대답하였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러한 그의 판단이 도덕적으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습 4. 러시아. 소련이 붕괴되다.
이렇게 중국은 서구 자본을 수용하고, 정치/경제적 자기 조정을 거치며 90년대를 맞이한다. 하지만 90년대의 시작은 중국에게 또 다른 시련을 요구하는데, 소련의 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 붕괴를 인식하는 중국 지성계의 태도이다. 우리는 소련의 붕괴를 '공산주의의 모순'으로 생각한다. 그런 만큼 중국의 소련 붕괴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우리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의 시선과 높이를 선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중국의 분석은 이러하다.
1.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적 관료주의와 교조적 이데올로기가 산업자본 토대의 경제적 단계에 반작용하여 초래한 실패이다.
산업 자본은 농업과 다르다. 농업이 긴 시간을 두고 생산-분배를 거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산업 자본은 매일매일 새롭게 생산하고, 계속하여 소비해주어야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소련은 계획 경제의 이상을 버리지 못했고, 거기에 중앙집중화로 인한 관료들의 부패가 늘어나며 산업 자본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2. 소련은 "화폐화"의 실패로 국제 금융 자본주의 질서에 참여하지 못했다.
소련은 80년대 말까지 물물교환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금융화와 국제분업을 거치며 자신의 생산력을 더욱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화를 거부한 것은 자본의 유입을 그만큼 줄이고, 자본의 유입을 줄인 만큼 생산성은 하락한다. 경제 규모의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경쟁적 냉전을 이어가기는 힘들다는 분석이다.
3. 소련의 붕괴는 전통적인 산업자본 제국주의가 금융자본 제국주의에게 패배한 것이다.
위와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중국은 소련의 붕괴를 공산주의-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 구조의 차이로 분석한다. 아마 이러한 인식은 정치 체제를 붕괴 원인의 주된 원인에서 제외함으로써 중국식 사회주의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적 분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질서를 지켜보며, 덩샤오핑은 1992년 남방 순시 연설을 통해 완전한 화폐화로의 진입을 선언한다. 그전까지 중국은 물물교환을 도와주는 표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모습 5.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본인들의 위치를 재조정한 후, 다시 한번 중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분석을 내놓는다. 그들이 보기에 중국은 '예속된' 상태였다. 중국은 상품 생산의 아이디어와 원재료는 외국에 의지하였고, 이윤이 낮고 리스크가 큰 생산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됨에 따라 아이디어/재료와 생산 노동 간의 가치가 벌어짐에 따라 이러한 위기의식은 계속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 학자인 데이비드 하비는 이러한 글로벌화를 지켜보며 "급속히 누적되는 자본의 잉여로 인해 세계의 지리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라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위기의식에 마지막 한방을 선사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중국에서만 2천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중국의 경제적 위기의 원인이 미국의 은행 붕괴라는 사실은 현재의 세계가 얼마나 위계적인 자본주의적 질서로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는지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의 정의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은 '현대화'를 "자본과 리스크가 동시에 도시로 집중되며, 주기적으로 위기를 불러오는 것"으로, '자본'을 "인류가 자본주의 역사 단계에서 발명했지만, 도리어 극소수 집단에 의해 장악된 소외물"로, '제도 이행'을 "수익을 보유한 집단이 리스크와 비용을 외부로 전가하는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분석하였다. 모두가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한국 사회에서는 나오기 힘들었던 시선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은 일종의 '4 불가능론'을 내놓는다.
1. 미국의 비용전가식 금융자본주의를 중국은 막을 수 없다.
2. 중국이 미국의 재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3.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가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었지만, 중국은 이를 담론화 할 수 없다.
4. 따라서, 중국의 '친미'는 언제나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이러한 인식은 경제적-정치적 차원에서 꽤나 솔직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고수익 산업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의 지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인권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정당성을 쥔 미국의 지위에서 중국의 친미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 인식은 어느 부분에서는 놀랍기까지 하다. 또한 이러한 사유는 한국 담론의 주류인 미국-중국의 '대립'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과연 두 국가는 동일한 높이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말이다.
모습 6. 시진핑. 일대일로 사업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의 끝에서 등장한 것이 '일대일로' 사업이다. 일대일로는 한편으로는 상하이 국제은행 등 미국의 금융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금융 기구를 마련하고, 한편으로는 원자재-생산에 예속되지 않기 위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업이 향후 중국의 세계 인식과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흔히 마오쩌둥 시대를 중국의 '조정기'라고 본다. 갓 태어난 신생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여러 경험을 거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덩샤오핑 이후로 후진타오까지의 시기를 '개혁/개방 30년'으로 말한다. 이는 중국이 자본주의적 질서에 순응하면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자기 조정 과정을 거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진핑이다. 시진핑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고도로 금융화된 현대 사회에서 금융 자본의 요구와 중국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중국식 사회주의란 무엇인가'하는 해묵은 질문에 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일대일로 사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한국의 보도를 보면 갈등과 분쟁의 소식들이 많이 들려온다. 물론 그것들도 전부 사실이고, 중국이 가진 모순이 이제야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쪽 눈만 가지고서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일대일로는 중국 내부의 과잉 생산력과 새로운 금융 이익을 처리하기 위한 외부 공간의 개척이다. 중국 내의 지성인들은 이 과정이 서방 세게의 제국주의적 약탈과 지정학적 판단이 들어간 글로벌화와는 달라야 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게 복잡한 사건들의 연속을 지켜보며, 나는 중국의 '높이'에 대해 생각한다. 중국은 분명 오래된 문명이다. 중국을 단편적 정보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주장이 갈리고, 혐오가 깊어지는 시대를 부유하는 담론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중국의 높이를 생각한다. 저 너머에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 장엄한 '죽의 장막'이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도록 하는 것만 같다. 나는 그 너머가 너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