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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Nov 12. 2021

애상에 대하여

가즈오 이시구로의 미학

 '애상'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시간과 함께 사용된다. 우리가 어떤 것의 상실을 슬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대상과 함께 보낸 시간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역성과 이미 벌어진 일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항구성이 가져오는 회한의 감정과 연계된다. 하지만 우리가 애상을 느끼기 위해서는 한 가지 요소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인물의 반성적 인식이다. 때로 어떤 사건들이나 감정, 관계, 말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완전히 가지는 경우가 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의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때, 우리는 과거의 사건 이후로 펼쳐진 나의 삶이 마치 운명처럼 결정되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느끼고는 새삼 놀란다. 과거의 나를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내가 도달한 위치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나는 이 순간에 인물이 느끼는 애상이라는 감정에 쉽게 흔들린다. 너무나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과거의 사태들의 원인이 비로소 보이는 순간, 혹은 사실은 그 누구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단지 우리가 과거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각의 순간. 나에게 이러한 부류의 애상감은 중요한 문제고,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약해진다.


가즈오 이시구로


 하지만 나라고 해서 내가 어떤 감정에 약하고, 어떤 감정에 둔한지를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문학을 통해 나의 감정의 호불호를 발굴할 수 있었다. 그러한 내 감정의 고고학자 중 애상감이라는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일본계 영국인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이다. 그는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나 역시 우연히 그의 수상 소식을 들은 후 '남아있는 나날'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만났다. 나는 '남아있는 나날'에 받은 감명을 이어 소설집인 '녹턴'을 읽었고, 방금 전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신작인 '클라라와 태양'을 다 읽었다. 여기까지 읽은 후,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탐구하고자 하는 문제, 혹은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말에 설득된 지점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가 나를 무너뜨린 지점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행위는 '감정 없는 자의 감정 관찰'이다. 말하자면, '바보들의 행진'이 핵심인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부류의 인물을 통해 사실상 동일한 주제를 반복하고, 또 변주하고 있었다.


<녹턴>


 사실, 이러한 내용은 드라마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감정에 서투른 주인공과 주인공만 바라보는 인물 사이의 로맨스는 시대를 불문하고 선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어필하기 위해서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점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차별점은 인물의 실패에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야기에서 실패한다. 그들이 미처 몰랐던 과거의 진실을 깨닫더라도, 세계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녹턴>에서는 한 연인이 등장한다. 남성은 이미 전성기가 지나간 가수고, 여성은 스타에 대한 열망을 가진 배우 지망생이다. 그들은 헤어지고 마는데, 그 이유는 남자의 전성기가 이미 지나갔기에 더 이상 여성은 그로부터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뜻 보면 굉장히 불쾌한 서사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고, 흔들리고 엇갈리는 지점이 있더라도 결국 화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반대의 이야기, 즉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이 인물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변화로 인해 증발하는 현상을 직시한다. 하지만 두 인물은 각자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남자는 사랑의 변화를 이해하고, 여자는 사랑의 변화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이해'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에는 분명 간극이 있다. 이 간극으로부터 가즈오 이시구로는 애상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


 또 다른 예시로는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이야기의 끝에서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주인의 결정과 신념이 세계 2차 대전을 몰고 왔으며, 자신은 켄튼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둘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시 만나는데, 켄튼은 이미 남편과 자식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야 할까? 스티븐스가 마침내 깨달은 사랑을 목청 터져라 고백하고, 켄튼은 마침내 찾아온 사랑을 반기며 스티븐스를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서 켄튼의 남편은 켄튼을 때리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양아치여야 할까? 가즈오 이시구로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다. 둘의 삶은 또 다른 접점에서 다시 마주쳤을 뿐, 각자의 함수에 따라 곡선을 펼쳐나간다. 깨달았고, 후회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돌아오던 스티븐스는 '농담'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의미로 가득하고, 무거웠기에 놓쳤던 것을 이제 와서라도 찾기 위해 농담을 배우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면서 동시에 삶의 한계에 대한 애상이 결집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클라라와 태양>


 <클라라의 태양> 또한 이러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세계 인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휴머노이드인 AF'(Artificial Friend)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복제 인간과 인간 간의 윤리, 혹은 사람보다 더 사람다워진 존재의 도덕적 지위 문제에 대해 다룰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안노 히데아키가 <에반게리온>에서 복잡한 세계관 설정을 통해 인물의 선택과 세계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던 것처럼, <클라라의 태양>에서의 SF적 세계관은 각자의 인물들의 '선택과 후회'를 강조하기 위한 기법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조시의 엄마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향상된 아이' 수술을 받게 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딸의 건강이 약화된다. 릭의 어머니는 '향상된 아이' 수술이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릭을 수술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 자신의 아들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꿈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 놓이게 된다. 조시와 릭은 서로의 삶의 결핍을 인지하고 있고, 함께 극복할 타인은 서로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삶에 미숙하여 오해하고 실수한다. 조시의 아빠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직장을 잃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자아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 결과 가족과 멀어지고, 가족이 가장 아픈 순간에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조시의 어머니와 릭의 어머니는 같은 상황 (향상된 아이 수술)을 마주하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선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세계라는 타자가 개인의 자유의지를 비웃으며 삶 속으로 침입하는 순간, 인간은 당황한다.


 그리고 각 인물들이 당황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은 더욱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이미 첫째 딸을 잃어본 적이 있는 조시의 어머니는 조시마저 잃을까 봐 두려워 조시를 대체할 인공지능 로봇 제작에 착수한다. (그녀는 이미 첫째 딸을 되살리는 시도를 한 적도 있다) 또한 릭의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수십 년 전 자신이 무례하게 굴었던 전 연인을 만나 입학을 청탁한다. 조시는 릭이 자신은 향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향상된 아이들의 모임에서 마치 조시 또한 릭을 하찮게 본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릭은 이러한 조시의  태도를 이해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처럼 책 속의 모든 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합리적으로 행동했음에도 왠지 모르게 불행해지는 세계에 맞서 또 다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인물 간의 오해와 갈등은 더욱 증폭되며, 그렇게 삶은 서서히 무너져 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AF인 클라라의 위치는 어디인가? 우선, 클라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살펴보자. 클라라는 공간을 정육면체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대상의 움직임이 복잡해질수록 (예를 들면, 조시의 어머니가 복잡한 감정에 따라 복잡한 표정을 지을수록) 정육면체는 정교하게 분할되고 클라라는 이를 분석하여 상대방의 감정은 인지한다. 즉, 클라라는 수많은 표본을 수집하여 그와 가장 유사한 상황을 확률적으로 결정하는 빅데이터 기반 AI의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설 내내 이러한 클라라의 세계 인식 구조는 여러 번에 걸쳐 소개되고, 반복된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된 서술이 설명할 수 없는 클라라의 행동이 있다. 그것은 태양이 빛을 내리쬐면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클라라의 믿음이다. 클라라가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이유는 햇빛을 쬔 후 쓰러져있던 노숙자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는 단 한 번의 사건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이 사건을 마음 깊이 기억하고, 이 단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햇빛에게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믿음을 도출한다. 내가 집중해 읽은 것은 이 부분이다. 도대체 왜 클라라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자신의 인식 구조로는 도저히 도출할 수 없어야 할 믿음을?


 클라라는 공해를 유발하는 기계를 파괴하면 태양이 조시를 낫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실제로 행한다. 그 후 실제로 조시는 건강이 회복되는데, 이것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AF가 태양신과 거래를 한 것인지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클라라의 태양>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행동이 가져온 결과이다. 조시가 낫게 됨으로써 클라라는 릭과 조시가 영원한 사랑을 실현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둘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점점 멀어진다. 주변 인물들도 모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를 인정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인물들의 모든 성장 속에서, 클라라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쓰레기장으로 버려진다. 쓰레기장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정말 의미 있는 삶"이라 말하는 클라라의 모습.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모습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자주 사용했던 애상감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인물들은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것을 관조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클라라는 상황이 정확히 어떠한지 알지 못함에도, 자기 내부의 감정에 최대한 솔직하게 행동하였기에 그에 따른 결과에 낙담하지 않는다. 이는 비록 본인이 살아온 삶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 순간의 감정은 진실했던 자의 자부심이다. 이런 클라라의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불완전한 인간의 진심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어지럽다. 나의 작은 선택이 큰 차이를 만들고, 어느새 인생은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진심이라면, 혹여나 다가올 미래의 후회의 순간에 떳떳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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