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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Nov 27. 2021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부>


 나는 <애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를 '애상'을 전공으로 한 내 감정의 고고학자로 명명한 적이 있다. 나에게 문학은 내가 느꼈던 감정을 구체화하여 적합한 이름을 부여하는 고고학적 발굴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깊숙하게 숨겨둔 나만의 감정을 폭로당한 듯한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발굴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느낀 이 수치심과 비슷한 무엇은 어떤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아무리 고민해보았지만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를 찾아냈는데, 이 단어가 나의 감정에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여 차용한다. 샤덴(Schaden)은 피해를 입는 것을 의미하고, 프로이데(freude)는 기쁨을 의미한다. 즉, 샤덴프로이데는 상대방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감정을 말한다. 우리말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유사한 의미의 단어가 있지만, 이 경우는 남에게 생긴 기쁜 일을 시기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샤덴프로이데는 단순한 질투의 감정도 아니고, 시기의 감정도 아니다. 나에게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몰락을 보며 느끼는 야릇한 도취감을 의미한다.


 아닌 게 아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관통하는 감정이 바로 샤덴프로이데이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작품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과 권력의 위계질서로부터 비롯되는 샤덴프로이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도덕적 당위이다. 누군가가 도덕적 당위를 소유하는 순간,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그를 시기하기 시작하고, 그의 몰락을 바라며,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를 갖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런 작품 설정은 꽤나 작위적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결국은 기독교 정신의 승리를 위함이 아닌가 싶다. 신은 모든 존재보다 도덕적이다. 신은 모든 존재보다 높은 도덕적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치정극, 가족 살인극, 재판극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도덕적 당위의 차이에서 느껴지는 샤덴프로이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그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기독교 정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대표적으로 카라마조프가의 중심인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행동과 말투를 살펴보자.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난봉꾼에다가 어릿광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작품의 초반, 표도르가 조시마 장로와 만나는 장면에서 그는 의미심장하게 자기 내면의 심연을 드러낸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난봉꾼',  '어릿광대'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더욱더'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자신을 단정 지으며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그 태도를 놀려주고자 더욱 난봉꾼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실, 그의 인생이 시궁창이라는 것은 표도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속으로만 생각했던 바로 그 사실을 타인에게, 그것도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듣는 순간 모든 것이 삐끗거리기 시작한다. 하찮게 보았던 존재가 도덕적 당위성을 획득하면서 자신을 단죄시키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 아마 표도르가 느꼈을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굴욕감이 아닌가? 어떻게 이러한 감정이 샤덴프로이데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가 '더욱더' 어릿광대처럼 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샤덴프로이데의 핵심은 타인의 몰락에 있다. 고귀하고 성스럽던 타인이 한순간 몰락하여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에 있다. 하지만 놀림을 받은 그 순간 표도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상황 자체에 균열을 줌으로써 상대방을 당황시킬 수는 있다. 그리고 그 당황의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역전의 순간이다. 비록 완전한 의미에서 타인을 몰락시키지 못했지만, 나를 '난봉꾼'으로 규정한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난봉꾼이 되어 그를 당황시킬 수는 있다. 그리고 이는 완전하지는 못할 망정 부분적으로나마 그에게 모욕과 불쾌함을 선사하는 '난장판'이 된다. 표도르는 상대의 얼굴에 드러나는 당황과 모욕의 표정을 통해 상대방을 자신의 상상 속에서나마 몰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카라마조프식'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카라마조프'라는 단어는 사람의 성으로도 사용되지만, 단어 자체는 '검은 피'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은유적으로 타락한 것이나 역겨운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샤덴프로이데의 감정이 충만한 혈통, 샤덴프로이데를 완전히 느낄 수 없다면 최대한 상대방을 불쾌하게라도 하고야 마는 혈통, 그것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공유하는 아버지의 피인 것이다.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첫째 아들인 드리트리는 이러한 아버지의 혈통을 가잘 잘 계승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약혼을 맺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그의 성격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곤란에 빠트린다. 드미트리가 카체리나에게 꼭 필요한 돈을 곧바로 지급하지 않은 채, 그녀가 그의 앞에서 '비굴하게' 부탁하는 몰락의 순간을 즐기려 하는 것부터가 지극히 카라마조프적이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인 표도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양심이, 그것도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양심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드미트리가 카체리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이다. 카체리나가 그에게 아양을 떨거나 육체적인 조건을 빌미로 돈을 받지 않은 채, '공손히'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돈을 부탁한 순간, 모든 도덕적 당위성은 카체리나에게 부여된다. 그리고 드미트리로서는 결코 이러한 행위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것은 아버지의 카라마조프적인 횡포에 굴복하고 몰락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정작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사람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야 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올바른 기독교'를 상징하는 인물일까? 사실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이 바로 이것인데, 그는 일차원적인 관계와 상징을 통해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스러운 행위를 끈질기게 잡고 늘어져 그 이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악과 마주하려는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카체리나의 경우, 나는 차라리 이것을 '뒤집어진 샤덴프로이데'라고 말하고 싶다. 성인의 몰락에서 느껴지는 희열감이 카라마조프적인 남성적 샤덴프로이데라면, 자신을 몰락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성인화 하며 기쁨을 느끼는 여성적 프로이데가 카체리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글의 말미에 보충하겠다.) 카체리나의 경우를 보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드미트리에게 돈을 받아 아버지를 곤경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외간 남자에게 수모를 받는 것도 감수하는' 카체리나 스스로의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저(카체리나)는 그이(드미트리)의 신이 되겠어요! 행복을 위한 도구가 되겠어요!"라는 대사는 그녀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카체리나는 자신의 도덕적 당위성을 바탕으로 '용서하는 자'로서의 권위를 드미트리로부터 얻고 싶은 것이며, 동시에 철저히 드미트리에 복종하는 아내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성인화하고 싶어 한다.


 비슷한 여성적 샤덴 프로이데는 드미트리의 정부인 그루셴카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루셴카는 어린 시절 약혼을 한 폴란드 장교로부터 버림받은 과거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트라우마로서 그루셴카를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루셴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표도르와 드미트리를 가지고 놀며 스스로를 '하찮은 여자'로 격하시키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버렸던 폴란드 장교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를 용서하고 함께 과거의 영원한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루셴카는 스스로를 하찮은 여성으로 만듦으로써 그를 둘러싼 남성들 또한 몰락시킨다는 점에서 카라마조프적인 샤덴프로이데를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폴란드 장교를 죽이겠다고 말은 하지만 "그를 용서할 것"이라는 알렉세이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탕아를 용서함으로써 도덕적 당위성과 권위를 행복으로 취하고 싶어 하는 여성적 샤덴프로이데를 지닌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타인을 몰락시키면서 얻는 희열과 스스로를 격하함으로써 얻는 성인의 감정이다. 이 두 감정 사이에서 모든 인물들이 갈등하고, 그들의 갈등이 엇갈리는 순간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이 바로 드미트리의 부친 살해, 정확히 말하면 부친 살해 혐의이다. 이를 정확히 하기 위해, 우선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드미트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3000 루블'이다. 이 돈은 그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로부터 받은 돈으로 그녀의 친척에게 드미트리가 전달했어야 하는 돈이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카체리나에 대한 반발심(사실은 스스로의 나약함과 악을 향한 자책)으로 그 돈을 그루셴카와 함께 놀며 탕진한다. 이후 드미트리는 이 돈을 어떻게든 갚으려고 하는데, 이러한 생각 자체가 드미트리라는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정말로 탕아였다면, 그냥 그루셴카와 함께 도망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어떻게든 그 '3000'을 갚음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지키는 것을 목숨만큼 소중히 여긴다. 이 상황 속에서, 드미트리는 두 가지 결핍과 마주한다. 하나는 그루셴카의 마음이다. 그루셴카가 정확히 그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이상, 드미트리는 언제나 아버지와 연적 관계의 대립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결핍은 돈이다. 카체리나에게 '양심 값'을 지불하고 그루셴카와 떠나 정착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자신에게 그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인 표도르 카라마조프뿐인 것이다. 더군다나, 표도르는 너무나 카라마조프답게 그루셴카가 자신에게 시집을 온다면 정확히 '3000 루블'을 선물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다니기까지 한다. 


 이러한 긴장이 해결되는 방식은 다소 의아하다. 드미트리는 그루셴카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어디론가 이동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당연히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그녀는 폴란드 장교를 만나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즉, 아버지와의 갈등이 살인으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사실'이 아닌 '망상'이다. 드미트리 본인도 "실제로 아버지를 죽일 생각은 없다"면서도 하나의 단서를 덧붙이는데, "가끔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역겨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역겨운 표정'이 드미트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드미트리가 혐오하는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순간'인데, 그 순간은 바로 몰락의 순간이다. 자신의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약혼녀를 버린 탕아, 그런 탕아인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마저 가장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몰락. 그리고 자신과 그의 차이는 자본의 소유 여부라는 치욕이 만들어내는 몰락 말이다. 드미트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즉, 아버지가 자신의 몰락을 바라보며 지을 샤덴프로이데의 표정이며, 다른 누구도 아닌 드미트리 본인이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루셴카가 아버지에게 갔다'는 망상은 드미트리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사건이고, 만약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를 재기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카라마조프적인 샤덴프로이데가 엇갈리는 순간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결코 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 그루셴카가 아버지의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를 몰락시킬 샤덴프로이데의 표정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드미트리의 범죄 여부를 끝까지 명확히 밝히지 않지만(스메르쟈코프의 자백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 내가 드미트리는 결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드미트리가 표도르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또 다른 자식에게 결국 살해당한다. 그의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가 범인인데, 사실 그 역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포함되는 인물이다. 스메르쟈코프는 이중적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신성한 바보로 인식되는 '유료지브이'로, 러시아의 순수한 정신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유로지브이가 러시아의 가장 타락한 피인 카라마조프에 의해 더럽혀진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스메르쟈코프는 항상 러시아를 떠나고 싶어 하고, 유럽을 동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그의 내부의 카라마조프적인 광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결국, 자신의 한계가 왜곡되게 표현됨으로써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메르쟈코프에게 '3000 루블'은 무슨 의미였나? 자신에게 어떠한 통로도 없음을 알게 된 스메르쟈코프의 마지막 선택이 샤덴프로이데였다는 것으로 나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이 명확해지는 지점은 스메르쟈코프가 3000 루블이 담긴 봉투를 현장에 남기고, 그 돈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스메르쟈코프는 카라마조프가의 파멸을 원했다. 그는 이반을 충동질하고,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며, 현장에 돈 봉투를 의도적으로 남김으로써 '카라마조프 부친 살해극'을 실질적으로 기획한다. 그가 3000 루블을 얻은 후 유럽으로 떠나는 선택을 하지 않고, 그 돈을 이반 앞에서 보여주며 그를 정신적으로 몰락시키는 것이나, 드미트리의 확실한 유죄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는 진심으로 카라마조프의 몰락을 원했으며, 그 순간의 기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능가하는 샤덴프로이데를 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치밀한 심리극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심리인 무시받고 싶지 않은 심리, 너보다는 내가 위에 있다는 심리를 극적으로 강조하여, 이것이 가져오는 파국을 치밀한 내면 탐구와 사건 구조를 통해 몰입감 있게 설명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아직 질문은 남아있다. 왜 도스토예프스키는 샤덴프로이데의 감정을 이 소설의 무대에서 강조하였는가? 왜 그는 많고 많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샤덴프로이데의 감정을 중점으로 인간을 탐구하였는가? 이 지점에서 2부가 시작된다.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을 통해 인물들의 갈등 구조를 설명한 것이 나의 글의 1부였다면, 2부는 조금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다가간다. 내가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은 이반의 '대심문관', 조시마 장로의 언행, 그리고 일류샤의 죽음과 알렉세이의 반응이다. 이 세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나는 어떻게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을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나의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2부>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드미트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감정과 행위의 차원에서 소설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이반은 주변인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관념적 측면에서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그러한 이반을 상세히 들여다본다면, 나는 그를 '믿고 싶으나 믿을 수 없는 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이반을 관통하는 관념은 '불멸'인데,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국가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반의 논문에서 이를 잘 드러낸다. 하지만 그가 알렉세이와 갈라서는 지점도 바로 이 논문을 소개하는 장면인데, 알렉세이가 진심으로 논문의 주장에 찬성하는 쪽이라면, 이반은 그 논문을 하나의 냉소로서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이반은 자신의 생각은 알렉세이와 같으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불멸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그래서 이중적이다. 이반은 진심으로 불멸을 믿고 싶어 하고, 불멸을 통해 세상의 도덕과 정의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망상에 불과하며, 세상은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도 이반 자신이다. 이반의 분열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이반이 사용한 '불멸'이라는 단어는 서양 철학사에서 실재론자들의 기본 전제를 뜻한다. 플라톤을 시작으로 칸트에서 완성된 서양 인식론은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객관적인 법칙과 도덕이 존재하며, 이성을 통해 이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앎'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서양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 정신은 도덕과 정의의 불멸을 보장해주는 보증인으로서 신을 믿어왔다. 글의 초두에서 말한 것처럼, 신은 어떠한 존재보다 도덕적 당위성을 가진 자이다. 신이 불멸하며 존재함으로써 그로부터 파생된 도덕과 자연법칙, 그리고 사회정의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불멸이 없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이반의 말은 불멸이 없다면 세상의 도덕과 정의가 의미를 잃어버리기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희망과, 실제로는 불멸이 없는 이 세계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절규가 뒤섞인 이반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이반의 냉소가 절정에 달하는 구간이 바로 알렉세이가 '대심문관'이라는 이반의 서사시를 듣는 장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니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부분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먼저, 대심문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반이 가진 의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무고하고 약한 자들의 고통이 '조화와 영광'을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지를 묻는다. 이 물음은 굉장히 직관적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무지 신이 이런 세계를 허락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빈번히 발생한다. 말하자면, 정말이지 신은 '무능력하거나 악한' 존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반의 물음은 구원과 불멸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적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보여준다. 알렉세이는 이에 대해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입장을 반복하는데, 예수가 모든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까지 대속한다는 의미로 죽었기 때문에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는 이 답변에 대한 냉소로부터 시작된다. 우선, '대심문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야기는 예수가 중세 시대 어느 마을에 재림하면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재림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 그를 다시 한번 메시아로 모시지만, 교회는 그를 잡아와 감금한다. 재림한 예수와 대면한 어느 늙은 교인은 예수에게 왜 돌아왔냐고 화를 내며 그의 사상과 죽음이 인간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신약 성서에서 예수는 광야에서 명상을 하던 중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는 '광야의 유혹'이라는 부분이 있다.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높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서 하느님이 예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것이며, 세 번째는 악마에게 복종하는 대신 광야의 모든 땅과 재물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첫 번째 유혹은 감각적인 행복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두 번째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믿음과 수행의 종교로서 기독교가 나아가야 함을, 세 번째는 유일신으로서의 야훼의 권위를 소개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었었다. 하지만 늙은 교인은 이 장면을 뒤집는다. 예수는 비록 빵보다 영적인 성장을 원했지만 대중들은 눈앞의 빵을 원했다. 예수는 하느님을 시험하고 자신의 믿음이 일신을 보호하는 기복적인 신앙으로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표징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일신으로서의 야훼를 위해 모든 재물을 거부하였지만, 대중에게 야훼는 자신의 일신을 지키고 재산을 불려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결국 늙은 교인의 입장은 이러하다. 예수가 인간에게 주려한 것은 자유였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를 통해 믿음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끊임없는 구도를 통해 신으로의 복종으로 다가가길 바랬다. 자유를 통한 복종이라는 기독교적 정신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자유보다는 빵을, 믿음보다는 기복을, 구도의 고통보다는 기적의 표징을 원했다. 인간은 예수의 가르침과 자유를 본받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또 악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늙은 교인은 그들을 위해 기만을 시작한다. 그는 믿음으로 대중을 기만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빵과 기적을 팔고, 그 대가로 복종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어쩌면 이반도 늙은 교인의 입장에 동의하는 것일까? 그래서 '카라마조프식'으로 스스로의 영혼을 추락시킴으로써 질식하려는 것일까? 대심문관은 예수의 죽음 이후 생성된 교회 사회와 대중들이 어떻게 예수 본연의 모습을 왜곡시키며 취해왔는지를 고발한다. 덧붙이자면,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한 부분도 바로 이 지점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들은 '신이 너무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신을 죽여버린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신이 용서하고, 회개의 길로 이끄는 것이 너무나 모욕적이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1부의 질문에 답을 해보자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샤덴프로이데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관통하는 정서로 설정한 이유는 바로 이 '최후의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조시마 장로를 살펴보자. 그는 이반의 '대심문관'처럼 대중을 속임으로써 세계를 유지하려 하는 기만자인가? 아니면 이반이 보지 못했던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참된 기독교인인가? 개인적으로 조시마 장로에 대해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는 세 명의 신도와 만나는 장면에서 작품에 등장한다. 신도들은 각자의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각자의 물음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호소하는 미망인은 모든 인간이 어느 순간 겪게 되는 죽음의 문제를, 남편을 살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인은 기독교의 한 기둥을 담당하는 죄인의 회개라는 문제를, 그리고 딸의 신체적 불편함을 말하는 여인은 신적 능력을 통한 치유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죽음, 회개, 치유는 예수의 삶과 기독교의 정신을 관통하는 질문이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함께 조시마 장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는 사실상 이반의 '대심문관'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답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조시마 장로의 답변은 어떠한가?


 그는 죽음과 회개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하지만 치유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 부인은 조시마 장로를 만난 후 딸의 건강이 좋아졌다며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 말하지만, 조시마 장로는 이 문제를 굉장히 신중하게 다룬다. 그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여인을 축복하기보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니 너무 흥분하지 말라는 투로 답변한다. 그는 왜 이렇게 대답한 것일까? 조시마 장로가 다른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한 여인으로부터 관념적 인류와 개별적 인류 간의 간극에 대해 질문받는다. 즉, 머릿속으로는 인간을 사랑하고 싶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개별적으로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 그 사랑이 식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반이 '대심문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알렉세이에게 들려준 내용과 일치한다. 이반 역시 관념 속에서는 불멸을 믿으며 인류를 사랑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서는 도무지 그 사랑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시마 답변은 이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여인에게(사실상 이반에게) 답변한다. 사랑은 결국 실천적인 것이라고. 또한 관념적 사랑이란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으려는 욕구일 때도 있다고. 즉, 이반이 논리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법칙을 찾고 있는 자라면, 조시마 장로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찾고 있는 자라고 할 수도 있다.


 조시마 장로라는 존재가 이반의 '대심문관'에 대한 답변이라는 근거는 또 있다.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여기며 수도원으로 모여든다. 하지만 기적은커녕,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는 지독한 시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이에 사람들은 실망하거나 장로를 조롱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절벽 위로 뛰어내려보라는 악마의 속삭임과 사실상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수가 그 절벽으로 뛰어내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원한 것이 단순한 기적이나 표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야훼를 시험하지 않는다. 그는 야훼를 향한 무한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해 복종의 길로 가고자 하는 자였다. 하지만 조시마 장로의 죽음 이후 대중들이 보이는 반응은 마치 예수에게 "어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달라! 우리에게 기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대중들의 외침이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를 관념적으로 거부했던 알렉세이는 그의 눈앞에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자 수도원을 떠나 도망친다. 그리고 예수가 악마에게 시험받았던 것처럼, 그는 동료 라키친에게 끊임없이 충동질을 받는다. 그가 결국 그루셴카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은 라키친의 샤덴프로이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알렉세이가 이반이 던진 질문 앞에서 몰락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반과 달리, 알렉세이는 그루셴카의 집에서 스스로를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릴 힘을 발견하는데, 그것이 바로 '파 한뿌리'이다. 아무리 작은 행위라도 스스로 내딛는 자유의 행위. 그 행위의 집합에 신에 대한 믿음과 진정한 기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렉세이는 깨달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알렉세이는 이반과 완전한 결별을 한다. 알락세이는 그가 '타락한' 여자라고 생각했던 그루셴카의 '파 한뿌리'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조시마 장로가 말한 실천적 사랑의 길로 들어서고, 이반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불완전함을 지독하게 냉소하며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하며 두 형제는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그 결과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이반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착란증을 안게 되고, 알렉세이는 사람 내면의 조그마한 선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잘 가꾸어나가도록 조력해주는 인물로 성장한다. 그것이 알렉세이가 끝까지 드미트리를 믿으며 그의 무죄를 주장한 이유이고, 그것이 이반이 스메르쟈코프에게 "당신도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냐.",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 것일 뿐"이라는 말을 듣자 무너진 이유이다. 알렉세이는 타인의 마음속의 양심을 이끌어내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했고, 이반은 결국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대중의 특징이 자신의 내면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당한 후 무너진다. 그리고 이야기를 여기까지 이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결론을 내린다. 우선, 드미트리는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과 양심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은 도달할 수 없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변호사 역시 기독교적 가치를 끌어왔을 때 가장 진실에 가깝게 온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에 기적은 없었다. 드미트리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음은 무의미한 것인가?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2등 대위의 아들인 일료샤와 그의 친구인 콜랴이다. 특히 콜랴의 경우, 그는 마치 또 다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보인다. 그는 높은 것을 향한 지적 욕구가 충만하면서도,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를 매우 예민하게 생각하며, 때때로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모욕적이고 다소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고 한다. 이러한 특징은 모든 청년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쳐가는 단계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카라마조프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책은 콜랴를 카라마조프적인 파멸을 겪을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콜랴는 알류샤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하며, 자신의 말과 정반대 되는 행동을(이를테면 알료샤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개를 마치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 서슴지 않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에게 '좋은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재판 부분에서도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이는 하나의 은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드미트리와 이반이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좋은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알렉세이는 '좋은 스승'을 통해 카라마조프적 파멸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표현을 조금 확장시켜본다면, 콜랴는 방황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좋은 아버지(Father)와 스승은 기독교적인 신(Father)을 은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작품이 알렉세이와 콜랴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나는 것은 결국 알렉세이가 카라마조프가의 냉소를 끊고 실천적 사랑을 통해 누군가를 구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엔딩이 아닐까.


<TMI>


1. 이 소설은 길다. 그것도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광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장에 질겁하거나, 지루해할 독자들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이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러시아 예술가들 특유의 종교적인 집착 말이다. 그들은 예술의 형식과 인물의 감정, 관념을 극단적으로 일치시키려 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7분이 넘어가는 롱테이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광설 문장은 때때로 구도자의 고행처럼 보일 때가 있다. 


2. 남성적-여성적이라는 구분에 불편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세기 소설이고, 당시의 관념을 최대한 살려서 쓰고 싶었기에 이러한 표현법을 사용했다. 또한 실제로 남성 주인공들에게 나타나는 샤덴프로이데와 여성 인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샤덴프로이데에 차이가 있었기에 이를 구분하고 싶었다.


3. 개인적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굉장히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후 흔히 작품 뒤에 붙어있는 작품 해설도 읽지 않고 바로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도 이 소설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전문가들의 글을 하나하나 읽어볼 생각인데, 벌써부터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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