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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ㄴㅏ름대로 Jul 23. 2022

오름에 갔다. 오름이 왔다. 두 번째.

붉은오름과 따라비오름

붉은오름과 따라비오름은 매우 다른 스타일의 오름이다.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해 혼자일 때 많고, 얼핏 무뚝뚝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막상 가까워지면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살가움도 얼기설기 흘리고 다니고, 뒤돌아 느껴지는 배려심으로 간혹 뭉클해지게 만드는 녀석이 한쪽에 있다면, 다른 한 녀석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고, 과하지 않은 사교성과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편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이끌 줄 알았다. 이름으로만 예상한다면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그냥 어감상 붉은오름이 앞쪽의 유형이고 따라비오름이 뒤쪽일 것 같다.


붉은오름은 용눈이, 따라비, 아끈, 물영아리처럼 제주의 수많은 오름들과 달리 이름 자체에서 별다르게 추가적인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그 독특한 이유로 인해 특별하게 기억되었던 오름이었다. 앞쪽에서 수식어 역할을 하는 '붉은'이라는 명칭은 오름의 흙이 적색이었기 때문이라는데 제주의 토양 특성상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흙이라 특별히 붉다는 수식어를 붙여줄 만한 다른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과연 그러했다. 그에 반해 따라비의 명칭에 대한 설명은 몇 가지가 혼재하는 것 같다.


붉은오름에 가게 되었던 계기는 약간의 우연성이 작용했었다. 제주에 온 다른 일행과 만나기 위해 움직이던 도중 약속시간이 변경되어 갑자기 목적지를 잃고 의도하지 않았던 방황의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시간 보낼 만한 곳을 찾다 선택되었으니 외형적으론 우연이다. 다만 사랑의 순간도 그렇듯 작은 우연으로부터 인연으로, 또 거기서 운명으로 이어지지 않나. 이왕 가게 되었으니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살짝 품었다.


아, 그리고 붉은오름은 같은 이름의 붉은오름 자연휴양림 바로 옆이었다. 그래서 휴양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아름다운 풍광을 붉은오름에서도 볼 수 있길 기대했다. 다행히 그 기대는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분명 적중하는 듯했다. 입구부터 멋진 삼나무길이 반겨준다. 아까 들어오며 주차비 따로, 입장료 따로 받는 정책에 대해 살짝 툴툴거리는 마음이 있었는데 삼나무길 나무처럼 다시금 곧게 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붉은오름에서 내려왔을 때의 삼나무숲길 풍경. 올라갈 때 나무 위에서 비추던 햇살이 내려올 땐 나무의 허리춤에 걸려있다.



수직의 숲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위로 향하게 만든다. '왜 이다지도 삼나무들은 길고 곧게 자라나는 걸까...' 길고 곧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느라 그동안 참 많이 이용당했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삼나무 또한 인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튤립이 그랬고, 사과가 그랬고, 감자가 그러했다고 한다. 밀과 벼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원초적이고 강렬한 목적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숙명을 수행하는데 그중 어떤 생물은 그 과정에서 인간을 이용하는 방법을 유전자에 새겨 넣었다는 의미이다. 다른 종과 협력적인 형태로 공존 및 번식하는 생명체들이 종종 있으니 그 파트너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겠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주장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다만 관계성이란 참으로 묘하다. 일방적인 관계란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니까. 설사 그 존재가 '전능'을 두른 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들이 몇 마디 흘러갔다. 하지만 생각을 따라가려는 마음보다는 수직의 향연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쾌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훨씬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숲이 끝나고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은 계속 나무계단으로 이어진다. 일요일임에도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올라가는 내내 두세 팀 정도를 만난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다랑쉬오름처럼 숲길을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오른다. 첫 오름이 용눈이오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오름들도 외형이나 올라가는 방식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다음날 올라갔던 다랑쉬오름이 알려줬었고, 한 번 경험했으니 붉은오름의 오르막길에선 그런 실망(?)은 없었다. 이제 자신을 잘 보여주지 않는 태도에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 너희들이 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난 이제 알아. 너는 너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겠지.' 한 번 학습했으니 괜찮다고 짐짓 어른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보이는 것이라곤 등반길의 흔한 나무들 뿐이라 계단에 남겨지는 건 헉헉대는 발걸음의 불평밖에 없었지만 최소한 머릿속은 연꽃잎 철학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볍고도 가식적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가끔 바깥의 귀여운 오름이라도 보여주던 다랑쉬오름과 달리 붉은오름의 태도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한때는 이 나무도 단단하게 붙잡고 있던 대지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강풍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굼부리에 오르면 그래도 무언가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힘겹게 오른 굼부리에는 단지 표지판만이 있을 뿐이었고 난 그저 숲길 한가운데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 표지판마저 없었다면 다 올라왔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굳어버린 표지판 잉크 앞에서 어디서 끝나는지,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묻고 싶던 말들이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침과 함께 다시 삼켜져야만 했다. 그나마 한 줄 남겨진 텍스트에는 옆으로 110m 정도 돌아가면 정상에 도착한다는 정보가 건조한 목소리로 담겨 있었다. 그래... 정상에 가면 무어라도 보이겠지라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그마한 전망대가 하나 있다.


그곳에 오르니 그제야 수면 아래에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처럼 바깥 풍경이 보인다.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내가 걸어갈 길은 모두 나무들로 빽빽하게 덮여 있었고 오로지 오름 저 멀리의 풍광만이 나무숲을 넘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음에도 그 전부가 너무 좋았다.


여행 전에는 잘 몰랐다.


산의 등성이들이 겹쳐 있는 풍광을 내가 진짜 좋아한다는 점은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던 사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붉은오름의 정상에서 바라보게 되었던 장면은 또 조금 달랐다. 가장 큰 한라산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은 자태로 뒤에서 든든하게 다른 오름들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고, 그 앞으로 여러 오름들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어울려 있는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친밀했고, 낮게 깔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호방함도 품고 있었다.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우리나라이기에 고속도로만 지나도 산들이 겹친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볼 수 있는 비슷한 장면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해가 정면에서 비추고 있어 눈이 심히 부심에도 난 한동안 전망대 난간에 걸터앉아 앞에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너란 녀석은 이런 녀석이었구나...



나의 어설픈 핸드폰 사진기술로는 그 감동을 담아내지 못하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풍경 중의 하나가 예상하지 못한 선물처럼 붉은오름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붉은오름은 탐방로의 계단을 제외하면 사람의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런 오름이었다. 한참을 지나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다시 야생의 붉은오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거친 듯 풋풋한 그 느낌을 조금은 알겠다. 싫지 않다.


올라가는 길에 익히 알게 된 붉은오름의 스타일에 조금은 적응한 모양이다. 아니면 정상에서 보았던 풍광의 감동에 모든 불평이 눈녹듯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데이트 약속시간에 늦은 상대방에게 살짝 짜증이 났던 상황이었는데 날 위해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눈앞에 내밀었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려오는 길에선 아예 다른 기대를 접고 길과 길 주변에 조금 더 집중하며 내려왔던 것 같다.


자신보다 훨씬 굵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작은 덩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가느다란 가지에 매달린 더 작은 이파리들이 애처롭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덩굴에게 등을 내주고 있는 나무 입장을 돌아보면 전혀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저 작은 잎사귀들이 언제까지나 작진 않을 것이고 어느 순간엔 자신이 누려야 할 햇빛을 가로채 가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으니까. 생존과 공존의 경계선을 찾아 명확하게 선을 긋기란 정말 쉽지 않다. 하긴 세상에 어떤 구분인들 쉽던가.


그렇게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갑자기 등장한 새끼노루에 나도 노루도 함께 놀랐다.


하지만 놀랐을 법한 녀석은 더 달아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다시 풀을 뜯기 시작한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으며 녀석에게 위험스런 존재가 아님을 어필하고자 부던히 노력했다. 가지고 갔던 견과류로 관심을 한번 끌어볼까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녀석은 한 3~4m 정도 앞까지 다가와 잠시 멈춰서서 마치 마음을 여는 듯 마는 듯, 살짝 고개를 들어 눈길을 주는 둥 마는 둥,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바라보는 이의 마음만 설레게 하고선 애초에 나란 존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듯 통통거리며 떠나버렸다.



그래, 잘 가렴. 사람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해. 그래도 널 만나서 좋았어. 다듬어지지 않은 붉은오름이 선사한 마지막 인사였다.






따라비오름은 선택의 재미가 있는 곳이다.


처음 올라갈 때부터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난 왼쪽을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습관적인 발걸음처럼 왼쪽 길만을 인식한 채로 대략 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아 반대쪽에도 길이 있구나를 인지했던 것이고, 그 열 걸음이 아까워(?) 그냥 가던 대로 가자고 결정했을 뿐이었다.


얼마간 둘레길처럼 진행되다가 역시나 계단을 만나게 된다. 계단 초입 무렵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한 아이가 씩씩하게 계단을 통통통 뛰어서 내려온다. 아마도 부모와 같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먼저 앞질러 내려온 모양이다. 이제 거의 다 왔는지 묻기에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얘기해줬다. 하지만 막상 대답하고 나니 그 대답만큼 산에서 비일비재하게 사용되는 거짓말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아까 지나쳤던 사람도 분명 그렇게 대답했었고, 그보다 훨씬 전에 지나쳤던 사람도 똑같은 대답을 했었는데 어째서 목적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걸까 의아했던 아주 오래전의 그 기분이 갑자기 떠오르며 슬며시 웃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사실에 입각한 대답이었는데. 꼬마야, 넌 곧 입구에 다다를 거야.



사람이 만들어놓은 길 위에 길을 부정하는 생명이 피어올랐다. 절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꽃향유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길의 원래 주인은 자신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을까.



붉은오름만큼은 아닌, 아니 그보다 훨씬 적게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굼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라비오름의 본공연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보통의 오름은, 아니 최소한 내가 지금까지 만난 오름들은 굼부리 주변을 도는 둘레길이 원형으로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굼부리가 분화구였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그런 형태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새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길을 걸어가면 굼부리의 안쪽과 굼부리의 바깥쪽 역시 자연스럽게 구분이 되며, 안쪽과 바깥쪽은 한때 서로 다른 세상에 속했던 것만큼 각자 다른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따라비오름은 달랐다. 굼부리의 둘레를 도는 길임에도 그건 마치 굼부리의 구멍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길이었고, 그래서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런 형태였다. 그건 따라비오름의 굼부리가 하나가 아니라 세 개가 모여 있는 구조이기에 가능한 형태였다. 그래서 길도 하나가 아니었다.



다양하게 얽혀 있는 따라비오름의 굼부리길. 각각의 길들은 연결만 되어 있을 뿐 길 하나하나에 다른 이름을 붙여줘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개별적인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한 그곳은 그런 형식적이고 이분법적인 구분에 얽매이지 말고 그저 당신의 선택에 따라 다채롭게 즐기면 된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쪽 굼부리엔 억새가 가득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거기서 이어지는 한쪽 언덕엔 나무그늘 아래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는 한편 다른 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엔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용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꼭 크게 웃어야지만 유쾌했음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분하고 편안한 상황일 때 소소한 즐거움이 더 잘, 더 자주 발견된다. 따라비오름이 보여주는 편안한 상황에 맞춰 천천히 길을 걸으니 길마다 놓인 작은 즐거움들을 찾아내게 된다. 작은 꽃잎이 말을 걸고, 눈앞의 나비가 바람 인사를 한다. 게다가 따라비오름 자체가 가진 다양한 모습들도 한몫 했다. 어떤 길은 가볍게 이웃집 마실가듯 이어지고 어떤 길은 등산길처럼 아주 가파르게 이어지기도 하는 등 발걸음이 닿는 위치마다 준비해놓은 메뉴가 달라 굼부리의 길들을 모두 돌아보고 내려올 때쯤엔 마치 놀이동산을 한 바퀴 돌고 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따라비오름에선 어떻게 하면 오름과 인간이 같이 어울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오름이라는 본재료에 특별히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본재료의 맛도 살리면서 풍미를 배가시키는 약간의 손길들이 사려깊게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적당한 위치에 놓인 의자 하나가 오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색다른 포인트로 작용하고 있었다.



세 번이나 겪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지만 감출 필요는 없었다. 굳이 무거울 필요도 없다. 부정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애써 긍정으로 미화할 필요도 없다. 상처는 상처대로 자기 세월을 겪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물었다. 더 빨리 치유된 녀석도 있을 것이고 뒤늦게 아문 녀석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상처들이 모두 하나로 어울려 있다.


길은 재미있게, 기분은 자연스럽게.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발음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이다.



무엇을 얻어야겠다는 특별한 목적성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참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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