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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ㄴㅏ름대로 Aug 13. 2022

오름에 갔다. 오름이 왔다. III

산굼부리오름과 백약이오름

오름을 하나씩 다녀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오름에 대한 정보들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민도 같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곳들을 찾아가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그냥 느낌 닿는 데로 찾아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곳은 나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용하게 다녀오긴 어려울 것이고, 한편으론 그저 다른 이들이 칭찬한 내용에 대한 확인조사에 머무를까 싶어 선뜻 가봐야겠다고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느낌 닿는 곳을 찾아가자니 조용하게 나만의 감상을 채우는 시간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선택이 늘 괜찮은 결과를 보장한다는 법이 없었기에 역시 주저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분명 '마음 가는 대로'에 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실패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았었다. 분명 실패가 쥐어주는 실망이 있었지만 담담하게 받아 아쉬움 주머니에 담으면 그만이었다. 조금 덜 기대하고 조금 덜 기뻐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다가 예상 못한 기쁨을 만나면 좀더 감동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또는 지도만 보고 추측했던 곳에서 기대했던 바 이상을 만나게 되면 그건 엄청난 희열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 여행 일정이 막바지로 가고 있고, 제주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이 한정되어 있다는 조건이 추가되니 마음이 또 살짝 요동친다. 내 마음이지만 참 가볍다... 이전보다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가 점점 더 큰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것 참... 분명 선택의 자유를 가졌음에도 자유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라니.


용눈이오름에서의 경험은 내 느낌대로 가도 괜찮겠다 싶은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용눈이오름은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매우 유명한 오름이었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양쪽 모두에 속했다. 결국 절충하기로 했다. 정말 많이들 좋아하는 오름들 중에서 두어 곳은 한번 가보는 것으로, 나머지 일정은 그냥 지도에서 선택하기로.


산굼부리오름은 명백하게 전자에 속한다. 유명한 곳을 가기 위해선 일찍 움직여야 한다. 그런 오름들은 유명 연애인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니니까.



산굼부리오름의 언덕 초입. 다른 오름들과 달리 넓고 매끄러운 길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역시나 오름의 주차장부터 그동안 다녔던 곳과는 규모가 다르다. 다행히 내가 도착했을 무렵 넓은 주차장을 채우고 있는 차량은 서너 대에 불과했다. 기쁜 마음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티켓 판매대라는 다소 생소한 녀석이 오름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입장료인지 관람료인지 6천 원을 내야 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헐, 정말? 6천 원씩이나..? 누굴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해 저만큼의 금액이 필요한 걸까. 저 금액은 누가 어떻게 정했던 걸까. 잘 쓰이고는 있는 걸까. 입장권 자체엔 죄가 없을 텐데 괜스레 손에 들린 입장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입장권을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었던 안쪽 마당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이하는 존재는 나무들이었다. 오름과 꽤 오래도록 같이 지내왔을 법한 나무들이 주변을 감싸는 듯 터주는 듯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묵혀 만들어내는 음식들이 지니는 풍미처럼 이 안의 나무들도 오래도록 익혀낸 세월을 각자 독특한 자태로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서서 올려다본다.


여행은 분명 바깥으로 나가는 시간이고, 익숙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들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기본인데 의외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잘 몰랐던 자신에 대해서 발견하는 시간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 역시 이번 여행이 그랬다. 이번 여행의 수확(?) 중 하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조금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나무'였다.


하지만 소나무와 같이 누구나 알만한 나무의 이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무들의 이름이 생소한 나는 식물학자처럼 나무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 아니었던 듯싶다. 그래서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거고. 대신 생각해보면 나무들의 그 품새가 멋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무줄기가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가을 이후부터의 나무들이 내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푸른 잎사귀 가득한 풍성한 나무도 좋지만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 남은 빈자리에, 쓸쓸한 듯 담담하게 그 공간을 지키고 있는 가지들이 오히려 종종 시선을 잡아끈다. 매력적이다. 움직이지 않음에도 어떤 리듬감이 가지들 사이를 흘러간다. 화보를 위해 멋진 포즈를 취하는 모델 이상으로 각각의 나무들은 마치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 가지들을 뻗어내는 것만 같았고, 그 자태가 신비롭게 느껴지곤 했었다.


때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따라가는 수행자처럼, 때론 혼자만의 사랑을 품고서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가지들. 그리고 그 가지들이 그려내는 공간분할 마법. 휘어지고, 갈라지고, 꺾이고, 솟구치고, 벌어지고, 가라앉는 굵고 가는 검붉은 선들.


한때 허공이었던 공간이 거기에 먼저 있었을 것이다. 나무들은 오랜 시간 터득해 익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가지들을 뻗어내며 비어있던 공간을 하나둘 채운다. 그리고선 하늘빛은 잎사귀들에게 내어주고, 그 모든 것들을 지탱하고, 틔워내고, 운반하고, 생명의 씨앗들을 매어달고, 종종 자기 식구 아닌 녀석들조차 온몸으로 받아주는 나무줄기들. 그런데도 항상 느껴지는 겸손한 그 무엇까지. 그냥 참 멋지다...


만일 내가 소행성에 있었다면 난 바오밥나무를 뽑아주지 못해 곧 붕괴될 여덟 번째 행성 주인으로서 어린왕자를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산굼부리오름 입구에서



인상적인 나무들을 지나니 다른 오름들과 다르게 잘 포장된 길이 등장한다. 길 양쪽으로는 울타리가, 그리고 울타리 안쪽으로는 억새들이 가득하다. 아침의 햇살은 주로 구름 뒤에 숨어있어 따뜻함을 느끼긴 어려웠지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아직 차가움까지 배달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선선한 느낌과 함께 볼을 스쳐간 바람은 다시 억새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그 바람의 지휘에 맞춰 억새들의 군무가 펼쳐지기도 했다. 정말 멋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감상을 가로막는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울타리였다. 감상이란 것이 원래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그 주관성이 강하게 묻어난 모양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는 매혹적이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울타리는 나에게 자꾸 동물원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 물론 울타리가 없었다면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억새들이 힘들어졌을 수도 있겠지. 허나 그로 인해 오름은 오름이기보다 공원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울타리 안쪽일까, 아님 억새들이 있는 곳이 울타리 안쪽일까..?



잘 꾸며진 공원임은 분명했다. 매끄럽게 잘 닦여진 길과 울타리들로 잘 구획된 공간이 있었고, 발길 닿는 거의 모든 곳에 억새가 가득했다. 한쪽 언덕엔 특이하게도 무덤으로 사용되는 널따란 평지가 있었고, 반대쪽 언덕 아래엔 기암괴석들을 모아놓은 길도 있었다. 굼부리가 아니었다면 여기가 오름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뻔했다.


굼부리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일단 크기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햇빛 잘 드는 북쪽과 반대쪽인 남쪽의 식생 자체가 다를 정도라니까. 굼부리 안쪽은 숲과 벌판이 어울린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른 곳처럼 굼부리를 돌며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식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 하니 받아들여야지. 그리고 실제로도 걱정이 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굼부리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이미 몇 팀의 단체관광객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몇몇 학교에서 통째로 찾아온 듯 많은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한쪽에선 프로그램과 관련된 촬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여긴 오름의 경주이자 불국사였다.



산굼부리오름의 굼부리 모습



이상하게도 산굼부리오름에서 조금 더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엄청나게 컸던 굼부리, 오름을 가득 덮고 있던 억새밭과는 달리 작고 소소한 것들이었다. 막다른 길 끝에서 만난 구상나무와 그 사연이 반가웠고, 무덤이 있던 잔디밭에서 폴짝폴짝 뛰며 동영상을 찍던 한 여성의 모습을 귀엽다는 이미지로 수용해야 할지, 철없다는 행동으로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던 순간이 그러했다.


굼부리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자연스럽게 조금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거대한 굼부리와는 달리 길가에 떨어져 있던 작은 솔방울 하나가 작지만 주변을 잔잔하게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지만 그 분위기를 설명할 적절한 어휘가 그때는 없었다. 얼핏 솔방울과 관련해 읽었던 시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나중에 다시 찾아보니 허만하 시인의 시였다.)



하이~ 산굼부리오름의 솔방울 씨!



확실히 시인은 다른가보다. 훨씬 섬세한 시선과 손길로 순간에 머무를 수 있었던 감정의 끄트러기를 쫓아가 기억의 조각들을 기어코 건져내어 어떤 방식으로든 옷을 입혀내곤 한다. 시에 대한 감상과 평가 이전에 간혹 놀라고 감탄하게 되는 지점이다.


오름에서 내려오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것은 산굼부리오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백약이오름에 만약 해시태그를 붙인다면...

#마당발오름, #오늘도한잔친구, #재지말고그냥만나 정도를 붙일 것 같다.



백약이오름의 입구에 도착하면 오름에 오르기 위한 길이 바로 들판을 가로질러 굼부리를 향해 쭉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다소 직설적이다. 넌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구나... 직설적인 것은 단순명쾌해서 좋으나 결국 그건 상대방에게도 암암리에 같은 방식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력을 내포하고 있을 때가 있기에 나처럼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한 사람에겐 그래서 간혹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툭툭 쉽게 꺼내놓는 사람들에게 부인하기 어려운 매력을 느끼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이것도 다름을 매력으로 느끼는 지점인가... 다만 솔직함을 핑계로 거칠음도 따라오는 이는 제외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무시하는 솔직함과는 구별이 필요하다. 솔직하지만 그 안에 상대방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를 간직한 이들이 드물지만 있다.



나한테 오려면 그냥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쭉 터주는 백약이오름



주변에 항상 사람들로 둘러싸인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사람들과의 어울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 경우도 있고, 리더십이 좋아 다른 이들을 잘 이끌며 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돈에 이끌려 모이는 경우는 빼도록 하자. 그리고 약간 애매하긴 한데 그 사람의 인품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인품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애매하다고 보는 이유는 얼핏 보기엔 그렇지 않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중심으로 통상적인 일상의 범위를 가정하여 생활공간의 원을 그린다고 가정해보자. 주변에 사람들로 둘러싸인 사람들은 그 원 안에 평균보다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원의 주인공이 움직이면 원 주변의 사람들도 주인공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그런데 인품의 경우는 그런 결과에서 약간 벗어난다. 일상의 범위 내에선 사람들의 밀도도 높다고 보기 어렵고 그 사람이 움직인다고 해서 주변의 사람들이 같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애매하다.


하지만 원의 크기를 넓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관계성도 하나의 물리적 힘과 유사해 거리가 가까울수록 힘의 세기도 커지고, 거리가 벌어질수록 힘의 크기도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슬프긴 하지만 군대 간 남친과 멀어지는 것이나 멀리 떨어진 친구나 부모에게 소원해지는 것 역시 일정 부분까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기에 원의 크기를 넓혀 물리적 거리를 늘릴 경우 주변의 사람들 역시 줄어드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인품이 좋은 사람들은 당장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볼 땐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일상의 범위를 크게 넓혀도 사람들의 밀도가 생각만큼 많이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가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들,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게 남겨진 인품의 흔적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남는 모양이다. 비록 지금 시점에선 각자의 현실적인 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어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또는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라도 관계성의 한 축을 맡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인품이란 참 독특하고도 묘한 힘을 지녔다.



백약이오름에서 볼 수 있는 주변의 다양한 오름들.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기쁘게 소개하는 사람처럼 굼부리를 도는 내내 주변의 다양한 오름들이 하나씩 이쪽으로 인사를 건넨다.



백약이오름의 매력은 뭘까 싶었다.


사람들이 오름을 찾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백약이오름 옆에는 왜 이다지도 많은 오름들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궁금해졌다. 물론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삼백 개가 넘는 오름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제주에서 어느 오름을 오르더라도 혼자 독야청청 서 있는 경우는 없을 테니 말이다. 오름 옆에 오름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백약이오름을 오르내리는 가운데 펼쳐지는 풍경엔 계속해서 주변 오름들의 모습이 겹쳐서 보인다. 마치 자신보다 주변 친구들 얘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처럼. 주변이 항상 사람들로 둘러싸인 누군가처럼.


백약이오름은 털털하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으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름의 바깥쪽 경사면은 소들이 쉽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고 개방적인데 단순하게 쭉 뻗은 길을 통해 가로질러 올라가다가 몇 번의 지그재그 경사로만 지나면 바로 굼부리에 도착한다. 통상적으로 오름의 가장 신비스러운 굼부리조차 앞마당 잔디밭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곳에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속내를 드러냄이 자연스러운, 그래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굳이 긴장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드는 사람과 같아 누구라도 쉽게 스스럼없이 옆에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굼부리의 안쪽은 깊지 않지만 그렇다고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로우볼 그릇을 확대하면 딱 저런 모양이 될 것만 같은 형태의 굼부리다. 그리고 그릇의 포인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모양으로 마주보고 있는 언덕이다. 한쪽에는 올라가는 길도, 능선의 모양도 아주 부드러운 둥근 곡선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있고, 다른 한쪽엔 거의 비슷한 높이로 바닥에 붉은색 흙을 깔고서 주변엔 나무들도 거느리고 있는 살짝 뾰족한 모양의 언덕이 있다. 참 재미있는 구성이다.


털털하긴 하지만 흐리멍덩한 사람은 아니라고, 구분을 지어야 할 때는 분명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을까.



오름에 올라가면 정확히 두 언덕 사이에 다다르게 되고 거기서 오른쪽과 왼쪽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부드러운 등성이를 선택했었다.



처음 올라갈 때 잠깐 흩뿌렸던 빗방울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굼부리를 거의 한 바퀴 돌아올 무렵 다시 등장했다. 대신 양은 조금 더 많아졌다. 추적추적이라는 단어에 딱 부합할 만한 내림이었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계속 맞기엔 확실히 부담스러웠다.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나처럼 비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는지 발걸음을 재촉해 내려간다.


바바리코트를 입고 삼각대까지 챙겨와 사진을 찍던 한 여성이 뒤늦게 자리를 정리하고 조금 떨어진 앞쪽에서 내려간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코트의 뒷모습과 옆구리에 끼운 삼각대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배경음악 흐르는 상황이 아님에도 주변의 모든 분위기들이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시나리오를 들이밀고 있었다. 즉석해서 추천된 몇몇 대사들도 떠오른다.


그런데 잠깐. 이건 나의 진심이 맞나..? 지금 내가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비도 추적추적 내리겠다, 바바리코트 입은 여성과 내가 오름의 마지막 퇴장객이기도 하니 이건 분명 인연으로서의 조건들을 충족했다는 결론?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뒷모습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끌렸다고? 물론 운명적인 만남도 아주 작은 우연의 순간으로부터 이어질 때가 있긴 하지만... 아마도 이건 사람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 그냥 분위기에 취했을 가능성이 높았고, 어쩌면 알게 모르게 지치고 힘든 삶에서 마주치는 이런 순간들이 영화의 스토리처럼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늘 어딘가 담겨져 있다 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는 찍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일상의 어느 순간이,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듯하게, 또는 현실이지만 상상이 덧붙여진 현실로 눈앞에 다가올 때가 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혹시나 하는 마음은 현실에 나타난 작은 틈새에서도 꽃을 피워낸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현실의 어쩌면은 역시나로 메꿔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는 여전히 기죽지 않은 채 작은 기회를 비집고 다시 등장한다.


나만 이상한 걸까... 아님 피어나지 않은 꽃이라도 억지로 소환해내야 할 정도로 팍팍한 일상을 살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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