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니야? 중요하다고, 디자인!
"아니, 난 아직도 디자인이 더 중요해~~
일단 예뻐야 사고 싶어지는거 아냐? 평가는 그 다음.
내가 정말…하는 일 때문에 7년동안 꾸역꾸역 사용해온 맥북 팔고 갤럭시북으로 바꾸고 나서
그 푸르딩딩한 플렉스북의 자태를 볼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심지어 일 할때 즐겁지가 않다니까!!"
몇 년 전, 새로 산 갤럭시북 플렉스를 펼치며 노트북이 너무 미워서 싫어 죽겠다는 나의 불평에
"그래도 결국 갤럭시북으로 갈아탄 걸 보면 역시 디자인 보다는 기능이지?"라고 낄낄대는 친구에게 나는 정색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렇다. 나는 그 유명한 흑우 앱등이다.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애플워치, 에어팟, 모든 케이스와 악세사리들을 몹시도 비싼 가격에 정품으로 구매하고 한국에서 사용하기엔 다소 불편한 부분들이 있어도 기꺼이 감수하는 상 드응신.
스마트폰을 사용한 이래로 단 한번도 갤럭시를 구매한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난 삼성 제품을 쓴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딱 한 번, 십 수 년 전 42인치인가 Pavv TV를 쓴 적 있었는데, 오랫동안 잘 썼지만 광고에서 예쁜 디자인의 타사 제품들을 볼때마다 삼성 디자이너들 다 해고해야 한다고 툴툴거렸던 기억이 난다. 이후 다시는 삼성 제품을 사지 않았던 걸 보면...정말 어지간히 싫었나보다ㅎ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핸드폰은 늘 디자인이 좋은 스카이나 팬텍, 모토로라 등을 썼었고, TV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자제품은 LG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집안을 구석구석 돌아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 많은 전자제품 중 삼성 제품은 딱 하나. 아이패드를 구매하기 전, 출시 되자마자 구매했던, 펜슬 기본 탑재되어 있고 태블릿 기능까지 갖춘, 정말 오로지 기능때문에 구매한 갤럭시북 뿐이다!
이왕이면 다홍 치마라지만, 난 가릴 것을 다 못 가리는 치마라도 컬러풀한 다홍치마를 원하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키보드도 멜긱 모조68 키보드인데, 웹서핑 중 우연히 눈에 띤 디자인에 홀딱 반해 한 나절 찾아헤매다가 겨우 모델명을 알아내 작년 추석 주문했고, 해외배송으로 몇개월 기다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받았던 제품이다. (정말이지 내 일생 30만원짜리 키보드를 사게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한 일이 없다!) 키보드엔 한글 표기가 되어있지 않고, 아이패드에 펌웨어 설치가 안되어 한영키 전환도 너무 복잡하고, 영어 대문자 입력은 어떻게 하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맥쓰사에 질문 글 올려놓고 답변이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유니크한 디자인과 도각도각 이쁜 소리를 내는 이 기계식 키보드를 쓰기 위해 요즘은 일에 지쳐 퇴근한 뒤에도 괜시리 아이패드며 노트북이며 열어 할 일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곤 한다.
물론 시장에 딱 하나만 있는 제품이고, 지금 내게 그 제품이 없어서는 안될 상황이라면, 아마 당분간은 디자인이라는거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그 마저도 '당분간은' 이라는 단서를 달 수 밖에 없다. 일주일, 아니 한달이면 모방 제품들이 쏟아져나오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게 축복인건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는 기꺼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최대한 유사한 기능의 예쁜 제품을 찾아 헤맬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런데 요즘은 확실히 예전보다 디자인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서 궁금해졌다.
공인기관에서 받은 알 수 없는 성적서보다는 레드닷 디자인 수상 이력에 좀 더 마음이 가고,
빽빽한 글자로 설명해놓았지만 크게 와닿지 않는 기술 특허보다는
간결하고 친근하고 편리한 디자인이나 UX/UI가 더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게, 나 뿐은 아니잖아?
디자인은 멀게만 느껴지는 기술을 내 삶 가까이 가져다 주는, 복잡하게만 보이는 기능을 단순하고 아름답고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좋은 친구같다.
제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겐 좀 잔인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디자인이 별 볼일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제품을 체험해보기도 전에 결국 사라지고, 뒤이어 쏟아져나오는 모방 제품들에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봐왔다. 그 이후에 아무리 "원조는 우리에요!"라고 외친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맛집도 아니고, 역주행하는 노래도 아니고. 잊혀진 기술이 다시 혁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일어날 리가 없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겠지.
오래 전 덩치 큰 마이마이와 cd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던 것 만으로도 폼나던 그 시절, 이어폰이 달린 손가락 크기의 자그마한 기계에 수십 곡의 노래를 저장하고 목걸이처럼 들고 다니면서 원할때는 언제든 바로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그 아이리버의 광팬이었다. 또래 친구들에게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와 하얀 전자사전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이리버 제품을 디자인했던 김영세 디자이너의 인터뷰 기사나 다른 디자인들을 찾아 챙겨보기도 하고, 엄마한테 아이리버 전자사전좀 사달라고 생떼를 쓰기도 했으며, 미키마우스 모양의 mplayer 신제품이 나왔을 땐 잘 들고 다니던 기존 기계를 내팽개쳤다. 지금도 그 때, 아이리버의 디자인은 혁신이었고, 그 혁신이 아이리버 매출의 반 이상은 책임졌을꺼라고 감히 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단했던 아이리버가 지금처럼 보잘것 없어져 버린 것은 디자인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요즘은 아이리버가 뭐 만드나 검색해보니 칫솔살균기며 이어폰이며 로봇청소기까지 안 만드는게 없었고 예전의 명성은 온데간데 없는 초라한 뒷방 늙은이같이 웅크리고 있었다.그 모양새가 프리챌,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랑 나란히 손 잡고 나락으로 가버린 내 젊은 시절같아 급 서글퍼졌다.
한 때는 혁신적인 기능과 디자인으로 아이팟 저리가라 할 정도로 크게 유행했었는데,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저작권이 강화되고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면서 애플은 아이폰에 아이팟의 기능을 내장시키고 애플 뮤직을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변화에 앞장 선 애플은 스마트폰 시장, 음원 시장, 음원 재생 기기 시장, 심지어는 음반 시장, 음악 산업까지 통째로 흔들어 놓았고, 그 변화 속에서 아이리버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스트리밍을 메인스트림으로 만들어버린 애플과 달리 20년 전에나 유행했던 mp3 플레이어 / cd플레이어의 생산을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ai 번역 기능을 탑재한 단말기가 출시되고 무료앱이나 포털에서조차 번역을 서비스하는 요즘에 전자사전과 전자노트를 생산하는그 호기로움이 철 지난 사업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그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대표되던 아이리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이리버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철 지난 회사가 되어버린건, 과거의 영광을 놓지 못한 사업주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지 디자인만 중요시해서는 아니라는 소리다.
오늘도 난 생활속에서 수많은 디자인들을 평가하고 취한다. 분명 똑같은 기능의 제품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예쁘면 어느새 또 슬금슬금 장바구니에 주워담고 있고, 주위에서 "너 그거 있지 않아?" 하고 물으면 "이쁘잖아~"라고 천연덕스럽게 답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품과 산업에 디자인이 태동하던 그 시절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나도 이제는 보기도 좋고 먹기도 쉬운 떡을 만들기 위해 수많을 고민을 하고 산다
좋은 디자인은 늘 소유하고 가까이 두고 싶고, 자꾸 꺼내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다.
그게 디자인이 가진 힘인 것 같다.
좋은 기능은 이내 익숙해지고, 새 기능이 나오면 대체되기 마련이지만, 내 맘에 쏙 드는 좋은 디자인은 익숙해질수록 정이 들게 된다. 예쁜 옷은 깔별로 열개씩 사두는 사람이 생겨나고, 좋아하는 디자인의 골동품은 십수년이 지나도 좋은 가격에 거래되는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디자인을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