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어머님이 돌아가실 것 같다."
2008년 12월, 함박눈이 그렇게도 많이 내리던 어느 금요일, 강원도 철원에 계신 형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눈을 감으시기 전 못난 얼굴 보여 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란 생각에 서둘러 출발했지만, 눈 때문에 평소보다 40여분여 늦게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님은?"
"아직 살아계셔"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왜 이렇게 늦었냐는 눈치십니다.
병실에 들어서니 의식도 없이 깡마른 84세 노인이 어렵게 숨을 잡고 계셨습니다.
15일 전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실 때 이미 의식이 없으셨고, 3일을 넘기기 힘들다는 의사 말도 무시하고 벌써 15일째 이 상태로 계신 겁니다.
"이런 말씀드리기 뭐 합니다만, 이미 2시간 전쯤에 돌아가셨을 분인데, 의사인 제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당직 의사인 듯 보이는 분이 조용히 형님과 저를 복도로 불러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막내 때문이구나!'
왜 그제야 그 생각이 났는지요.
"어머님! 죄송합니다. 사실 저희가 거짓말을 했는데요. 실은 막내 8년 전에 죽었습니다. 가시면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씀을 드리자마자 마지막 숨을 놓으시던 어머님...
막내는 삼형제 중 유독 머리가 좋았습니다
"여기 부산△△경찰서인데요. OOO씨를 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시체가 발견이 됐는데, 와서 확인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2000년 3월 어느 날 새벽,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원주공항에서 김해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며 제발 동생이 아니길 빌고 또 빌었습니다.
막내는 우리 삼형제 중 유독 머리가 좋았습니다. 시골학교지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가정 형편상 형과 나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 어렵게 검정고시를 했지만, 막내는 그래서 집안의 희망이고 가족의 꿈이었습니다.
내가 군 생활하던 1983년도. 동생은 큰 형님이 무서웠겠지요, 나를 상담상대로 정했는지 면회를 왔습니다.
"형, 나 흥미가 없어 그러는데, 고등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하면 안될까?"
"행복에 겨운 소리하지 마라. 형들이야 환경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넌 여건이 되잖아. 안 들은 걸로 할 테니 다른 이야기하자."
몇 달 뒤, 면회 온 동생 녀석 머리가 길다고 느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학교 그만뒀지?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니 멋 대로냐'고 하면 반가운 분위기 망칩니다.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물었습니다.
"어쩔 계획이니?"
"검정고시해서 대학 가는 것도 멋진 경험이 될 거 같아."
"해봐라. 쉽지 않다는 건 잘 알 테고, 스스로 컨트롤 잘해야 할 거다. 이제 학생도 아니니 소주나 한 잔 할래?"
이듬해, 동생은 나와는 다르게 전국 2등으로 검정고시 합격을 했습니다. 대학을 간다던 녀석으로부터 느닷없이 '방통대 하면서 고시공부 생각 중'이란 편지를 받았던 시기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옆에 있다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녀석은 내 심정을 아는지 면회 대신 편지를 보냈던 겁니다.
제대 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막내 녀석이 "기가 막힌 사업이 하나 있는데, 밀어 줄래?" 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가능성이 있어보였습니다. 형님과 상의 후, "이건 어머님이 평생 이루어 놓으신 거니까 꼭 성공해야 한다" 는 말과 함께 집과 밭을 담보로 1억 원의 사업자금 만들어 줬는데, 딱 1년 만에 망했습니다.
졸지에 집이 없어져 식구들을 산속 무허가 빈집에 살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녀석은 가끔 편지만 할뿐 좀체 집에 오질 않았습니다.
영안실에서 동생을 데려 왔습니다
부산경찰서에 도착했더니, 담당형사가 소지품을 보여 줍디다. 시신 사진을 보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앞 건물에서 투신 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영락공원 시체 안치실로 가보세요."
동생임을 확인하고 형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막내 만났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다. 내일 데리고 갈게" 라고 말한 다음날, 울산의 어느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형님과 상의했습니다.
"어머님이 충격 받으실지 모르니 비밀로 하자."
8년간 어머님을 속였습니다
"막내 연락 오냐. 어떻게 지낸대?"
"어선 타고 외국에 갔대. 전화도 안 되는 나라래. 아마 3년은 있어야 온다는 것 같던데"
그해 추석명절, 어머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그 후 2년이 지난 어느 설 명절 전날, 느닷없이 어머님께서 다그치듯 물으셨습니다.
"혹시 막내 죽었니?"
아니! 어떻게 아셨을까? 머리가 쭈뼛서는 듯한 충격. 이럴 땐 태연한척 하는 게 최고입니다.
"에이 며칠 전 연락을 했는데, 뭔 그런 말씀을 하세요?"
"꿈에 비둘기 세 마리가 날아가다 가장 작은 한 마리가 자꾸 떨어지더구나. 동생이 어디 아픈데 있을지 모르니 연락들 자주해라."
초점 없는 어머님 눈에선 늘 동생이 보였습니다. 왠지 모를 어머님의 그 아픈 눈빛이 싫어 해마다 찾아오던 명절이 무척 싫었습니다.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막내를 그리움 한켠에 두고 사셨던 어머님, 마지막으로 보고 가시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셨을까, 의학상식까지 뒤집을 정도로 목숨을 잡고 계셨던 겁니다.
어머님! 살아생전 당신을 속인 건...
어머님을 조금만 더 곁에 두고 싶은 우리 욕심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