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하나로 신지식인이 된 사연
2001년도던가요!
서울시 명륜동에 있던 신지식인회관(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에 갔습니다. 신지식인 1호인 심형래씨를 비롯해 수상자들 이름이 빼곡히 적힌 커다란 표지석을 보며 7살 꼬맹이 아들에게 아빠이름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컴퓨터, 두려웠던 괴물
컴퓨터란 괴상한 기계를 처음 만난 건 공무원을 처음 시작한 1989년도였습니다. 강원도 정선군으로 첫 발령을 받은 후 신규교육을 받기 위해 강원도공무원교육원에 입교했습니다. TV도 아닌 것이 까만 화면(모니터)에 흰점이 깜박거리던(커서) 기계는 괴상함을 넘어 참 신기해 보였습니다.
정말 놀랐던 건 자판으로 글자를 치면 그것이 그대로 모니터에 보인다는 것과, 그 글자들이 프린터란 기계를 통해 출력이 된다는 건 신비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과연 내가 저것을 배울 수 있을까! 그렇게 8주 교육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주민 전산망 컴퓨터 한 대만 있고, 타부서 직원들은 전동 타자기나 수동 타자기를 사용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겨울철, 사무실에 난로 하나 없이 추위에 동동 거려도 컴퓨터 옆엔 늘 난로를 피웠습니다. 한여름 혹서기 때 직원들에겐 그 흔한 선풍기 한대 지급하지 못해도 컴퓨터에겐 선풍기를 돌려줬을 정도로 귀빈 대우를 했습니다.
1년 뒤 총무계를 시작으로 부서별로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컴퓨터는 대용량 저장장치인 하드디스크(HDD)는 없고, 5.25인치 플로피디스크(FDD) 2개 달린 80286XT 모델이었습니다.
이젠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는 불안감. 컴퓨터 학원에 8만원 내고 수강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무실에서 쓰는 프로그램(행망 워드인 하나워드)이 아닌 생전 처음 본 system, print, sum... 등 이상한 용어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gw-basic이란 프로그램이란 건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컴퓨터는 하나워드(금성소프트웨어)가 전부인 줄 알았던 난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워드는 안 가르치나요?"
"여기는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는 학원이지 그런 건 다루지 않습니다."
학원등록한 지 한 시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일한다는 친구를 어렵게 수소문했습니다.
MS-DOS 전문가 되다
"요새 컴퓨터 얼마나 하냐?"
"어떤 종류를 원하는데?"
"컴퓨터면 그냥 컴퓨터지 무슨 종류가 있냐?"
"무식한 자슥아! AT야, XT야? 그리고 메이커야, 조립품이야?"
그 친구는 점점 모를 소릴 했습니다.
"야! 니한테 설명해줘도 모르니까, 가게에 조립품 괜찮은 거 하나 있는데, 80만원에 가져가!"
사무실에선 조달을 통해 대당 160만원에 샀다던데, 그 정도면 엄청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둘러 용산엘 갔더니, "이게 AT컴퓨터라는 건데, 씨게이트 20메가 짜리 하드 있는데 달래? 그거 달으려면 20만원 더 내라" 사무실 컴퓨터는 80286XT(하드 디스크는 달 수 없는 구조)로 플로피 디스크드라이브 두개만 달린 것을 보아온 난 80286AT에 하드디스크 빼고 플로피 2개를 붙여가지고 왔습니다(이건 완전 기형입니다)
자취방 책상 위에 컴퓨터를 신주 모시듯 올려놓고, 컴퓨터바이러스가 있다는 말을 들은지라 사용하기 전 손을 깨끗이 씻는 건 잊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가 컴퓨터 책을 달라고 했습니다. 책방 아저씨는 어제 들어온 책(신간)이라며 두꺼운 책을 한권 건넸습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책을 폈는데, 대체 뭔 소린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DOS 운영체제를 쓰면서 UNIX책을 사온 겁니다.
며칠 후, MS-DOS 2.1버전 책을 구해 dir, copy, format, del, rename... 책에 소개된 명령어를 두드렸습니다. 말 잘 듣는 똑똑한 기계는 나를 며칠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 하드디스크가 이래서 필요한 거구나!'란 것도 그 즈음에 알았습니다. 용산으로 달려가 20메가 하드 디스크를 20만원 주고 샀습니다. 메가 당 만원 꼴이니 상당히 비싼 편이었지요.
1년 뒤, 하나워드프로세서는 거의 도사에 가까운 수준이 됐고, 로터스(스프레드쉬트), 닥터할로(그래픽 편집 프로그램), 데이터베이스3+ 까지 섭렵했으니 사무자동화는 완전히 끝낸 셈입니다.
직원들이 컴퓨터에 대한 질문을 하면 운영체제가 어떻고, 주소록을 만들려면 디베이스 프로그램을 써야 한다는 둥, 로터스를 가지고 봉급계산하면 한 시간이면 끝낸다는 둥 그야말로 아는 척은 혼자 다 했던 시기입니다. 직원 다수가 컴맹이라 대충 말해도 통했습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잘난 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95년, 도스 운영환경에서 가끔 보았던 윈도우3.1이 어느 날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란 괴상한 수식어와 윈도우95란 탈을 쓰고 등장한 겁니다.
누구나 마우스 클릭만으로 쉽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환경. 도스용 프로그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 다수는 윈도우95 등장이 그리 달갑진 않았을 겁니다. 맨땅에 헤딩해 가며 배운 도스 명령어나 응용프로그램이 한순간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1998년도쯤 태그 명령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언어도 아닌 것이 몇 개의 명령어를 순서대로 잇기만 하면 멋지게 화면에 구현되는 겁니다.
홈페이지를 만들자! 그런데 어디에 만드냐? 대기업이야 자체 서버를 구축해 홈페이지를 운영하면 되겠지만, 개인이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건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사이트가 넷츠고(nets go)입니다. 무료로 제공되는 용량(20M)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회원가입만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는 건 내겐 큰 행운이었습니다.
http://my-home.netsgo.com/ktsinh. 그때 만들었던 내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당시엔 많은 지자체가 홈페이지를 보유하지 않았던 시기로 내가 소속된 화천군(1993년도 정선군에서 전입) 또한 홈페이지가 없었습니다. 관광, 낚시, 축제, 군정안내 등의 정보를 올리고, 도시민들을 위한 산나물 이야기와 3개 사단이 인접해 있다는 점을 이용한 '군장병 면회객 안내’ 를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묻고 답하고'란 게시판은 하루 수십 건에 이를 정도로 '○○부대를 가려면 어떻게 가요?" , '△△부대 인근 숙박업소 좀 알려 주세요' 등 수많은 문의가 이어졌고, 매일 답글을 올리는 건 그야말로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란 인사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도 신문에 나던 시기
"여기 강원일보인데요. 주사님 홈페이지 내용을 박스기사로 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았죠. 신문에 내 주겠다는데...
'화천을 지구촌에 알린다' 다음날 신문에 사진과 함께 소개된 기사 제목입니다.
청내에 느껴지는 곱지 않은 시선들. 그럴 만도 한 것이 '군(郡)에서 해야 할 일을 지가 뭔데 나서서 잘난 척 하냐'는 일부 직원들의 수군거림과 눈총이었습니다.
며칠 뒤 경향신문 메거진X에서 "당신을 특집으로 다룰까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매거진X 한 면 전체가 내 기사로 도배된데 대한 희열. 신문보도 이후 홈페이지 접속 건수는 하루 수천 명에 이르렀고 매일 꿈을 꾸듯 살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보통신부에서 장관상을 주겠다는 제안은 '공무원들이 표창을 받으려면 공적조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려야 된다'는 내 상식을 뒤집은 경우이기도 했습니다.
신지식인이 되다
같은 해 제2건국위원회와 행정안전부에서 추진하는 신지식인에 선정되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국가정보화 유공. 홈페이지 개설을 통한 지역 알림이 국가 정보화 발전에 기여 했다고 생각하기엔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행안부 입장에선 홈페이지를 통한 군 장병 면회객 안내 등 개인이 자치단체에서 해야 할 역할을 대신 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