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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Jul 15. 2024

그리운 나의 스승, 나의 친구 낙스 (Knox)선생님

     

나에게는 선생이고 친구이고 엄마 같은 분이 있다. 미국에 살며 알아야할 기초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 소식을 끊고 지내다

지난번 그린즈버러에 갔을 때 오랜만에 찾아뵙고 회포를 풀었다.

 그린즈버러로 처음 이사 갔을 때 큰아이가 초등학교3학년이었다. 동양인 학생이 많은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전학 간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많이 힘들어했다. 친구도 없고 의논할 상대도 없어 학교 카운슬러에게 우리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만난 분이 낙스 선생님이다.


이분은 교육학을 전공하고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지 않고 자기 사무실에서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가르치는 분이었다. 동양 아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해 학교생활에 대해 배우기도 하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의논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분께 이야기하고 나에게 하지 못하는 말 까지도 그분에게는 하게 되었다.

그분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추천해 주고 아이가 나이에 맞게 성장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해 주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며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그만두고 둘째 아이가 가기 시작했고 둘째가 중학교에 들어가니 또 그만두게 되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는 내가 아이들보다 영어를 더 잘했는데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나의 영어를 부끄러워한다는 걸 느끼던 참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어도 잘 못하고 미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니 나를 가르쳐 달라고 그분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평생 처음 해 보는 과외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분은 내게 영어로 일기를 써 오라고 했다.


한국어로도 써 본 적이 없는 일기를 영어로 쓰려니  막막했다. 그래도 그걸 안 해오면 안 가르쳐 주시겠다니 하는 수 없이 되지도 않는 영어로 숙제를 해 갔다. 그리고 그분에게 정신적인 카운슬링과 영어교육을 동시에 받았다. 처음 2년은 꼬박꼬박 돈을 드렸다. 어느 날 그분이 이제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너와 만나 보내는 이 시간을 즐기게 되었으니 더 이상 너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 옛말에 돈을 안 내고 약을 먹으면 효과가 없다는 말이 있다. 선생님이 돈을 안 받으니 나는 점점 숙제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만나서 점심 먹고 수다 떨고, 파머스마켓 가서 꽃 사고, 그 집 가서 호숫가 산책하며 야생화에 대해 배우고 그러다 아이들이 속 썩이면 의논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영어공부룰 계속했더라면 지금의 내 영어 실력이 훨씬 좋아졌을 텐데 지나고 보니 아쉽다.


그래도 나는 지혜로운 선생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 내외는 뉴욕주의 호숫가에 여름 별장이 있어 해마다 여름방학 두 달 동안 그곳에 가서 보냈다. 알바니와 뉴욕에 사는 그분의 아들 딸들과 손자 손녀들도 방학이면 그곳으로 모이는데 주중에 일해야 하는 어른들은 주말에나 합류하고 손자 손녀들은 그곳에 머물며 방학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낸다고 했다. 그 당시 힘들고 바쁘게 살았던 나는 그럴 수 있는 그들이 무척 부러웠다.


식구들이 모이면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했던 나는 휴가 동안 그 많은 식구들의 밥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분들은 두 달 동안 도우미를 고용한다고 했다. 평소에 대단히 검소한 그들이지만 가족들이 모이는데 한 사람이라도 힘들면 그 모임이 오래갈 수 없다며 그런 때는 과감하게 돈을 쓰는 지혜로움이 부러웠다.


10여 년 전 나와 나이가 비슷한 그분의 딸이 뇌종양으로 어린 남매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떴다. 그분 내외는 너무나 조용하게 그 일을 받아들여 나를 놀라게 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위가 일 년도 안되어 새 장가를 들 때였다. 어느 날 사위가 장가를 가는데 입고 갈 거라며 결혼식에 갈 드레스를 한벌 사야겠다고 했다.

마음이 어떠냐고 정말 괜찮으냐고 물으니 사실은 반반이라 했다. 그래도 불쌍한 손자와 손녀에게 새엄마가 생기는 것으로 위안을 받아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쓸까 생각해 보니 나라면 힘들 것 같다.

 우리가 캘리포니아로 이사 올 때 온 식구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해 주고 노스캐롤라이나를 잊지 말라며 노스캐롤라이나 사진책자를 선물로 주셨다. 계속 연락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연락을 끊고 살았다. 이번에 가서 연락을 하니 그분의 남편 낙스 교수님이 지난 12월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분은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해 손자 손녀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려가는 멋쟁이 사회학과 교수님이었다.


 두 분은 20년 가까이 나에게 친구처럼 선생님처럼 미국 생활의 기본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다.

난초 화분 하나 사들고 그 집에 가서 그동안 연락 못 드린 것 용서를 빌고 세 시간 동안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았다. 세 시간 사이 그분은 열 번도 더 “너를 다시 만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하셨다.

여든의 나이에도 아직은 정정하시지만

언제 다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헤어질 때 꼭 껴안으며

“이 메일 해줘. 내가 너의 영어 교정해 줄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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