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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Jul 22. 2024

감자같은 내 얼굴

 내가 태어나 처음 배운 영어는 "아이 엠 어 걸 유 알 어 보이" 가 아니고 포테이토와 펌프킨이다.

중학교에서 갓 영어를 배운 오빠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또 다른 별명은 울보와 쇠고집, 내가 업고 노는 베개를 빼앗아 갔을 때나  내 몫의 먹을 것을 빼앗겼을 때 나는 힘차게 울어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대 가족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언의 반항으로 얻은 별명 쇠고집이다. 


정말 감자 아니면 호박이다..


 집 앞 골목에서  아이들은 고무줄, 공기, 땅따먹기를 하며 놀았다. 그 애들은 참 재미있게 놀았다.  나가서 그 아이들하고 놀고 싶은데 오빠들이 못 나가 놀게 했다. 빠끔히 열린 대문 사이로 아이들이 노는 걸 보기만 해야 했다.식구들 눈에는 바보 같은 내가 똑똑한 아이들과 노는 것이 불안했던 것 같다.


 학교에 오고 가는 길에 있던 수많은 만화가게, 문방구, 떡볶이 집…  들어가 볼 수 없어 호기심에 찬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착해서가 아니라 돈이 없고 혹시 있다 해도 그런 곳에 갔다 들키면 혼 날 까봐 못 간 거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서 지정해 주는 양장점에서 교복을 맞추어 입었다.

나는 엄마가 동대문시장에서 천을 사다 만들어 주셨다. 식구들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더 좋다고 말해 주었지만 나는 나 혼자만 전교생과 다른 교복을 입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더 좋은 것도 싫고 그냥 똑같기를 바랐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다닐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점점 없어지고 심술만 늘어났다.


 해마다 학급 사진을 찍는데 내 못난 얼굴이 제일 컸다.

사진을 찢어 버리고 싶은 나에게

아버지는 젊잖게 "두대 왈 상이요 족대 왈 적이라.. 걱정하지 마라." 하셨다.  머리가 크면 재상 감이요 발이 크면 도적이라.. 는 말인데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웃는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자가 되어서도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조금만  가꾸었더라면 내 인생이 좀 나아졌지 않았을까?

남자를 소개받아 나가면서 맨 얼굴에 생머리로 나갔다가 성의 없다고 퇴짜를 맞은 적도 있다.

결혼식 날 남들 다 하는 신부화장도 안 하고 미장원도 가지 않았다.


운명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대문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던 아이가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아이들 낳고 살림하고 나이 들어서도 나는 나를 예쁘게 가꾸지 않았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지나온 세월이  얼굴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커다란 얼굴, 고집스러운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 의도적으로 힘을 빼지 않으면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얼굴.

 이 얼굴을 만들어 준 엄마 아버지에게 물러 달라거나 고쳐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얼마 전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오빠들에게 왜 그렇게 나를 구박하고 놀려 먹었느냐고 항의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라는 말이 돌아왔다.

"뭐야.. 그럼 그때 그렇게 말 좀 해주지 그랬어?  난  어린 마음에  얼마나 속 상했는데."

"넌 참 바보로구나, 옛날엔 다 그랬어"

우리 식구들에게 난 여전히 바보다.



얼마 전 신세계백화점에 갔다. 나 젊었을 때 가끔 가던 곳이다. 말끔한 청년 직원이 나에게 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명품관입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기죽을 나는 아니다. 그 건물에서 나왔다. 그 직원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는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없어서다.


어려서 우울한 시간을 보냈어도

가난으로 비참한 사춘기를 보냈어도 다 지나간 일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큼은 어깨 확 펴고  누가 뭐래도 나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갈 거다.

정말로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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