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입시 1
2021년 11월,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사건이었다. 그것도 핵폭탄급 사건이 분명했다. 세상 무엇보다 잔잔하고 평온하던 나의 일상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입시’라는 거칠고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입시에는 문외한일뿐더러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덥석 물어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바로 코앞에 둔 조카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고모가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결혼 전까지 삼대가 함께 하는 대가족 속에서 두 조카의 탄생과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영광을 누렸었다. 함께 산 세월만큼이나 조카들에 대한 애정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남달랐고, 조카들 역시 고모인 나를 신기하다 싶을 만큼 잘 따랐다. 그렇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조카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남동생 부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 같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애를 썼다. 돈이나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려 부단히 노력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 같이 놀아주고 둘러앉아 밥을 먹고 몸을 부대끼며 함께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런저런 실수도 있었고 그래서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 상처마저 좋은 밑거름으로 삼아 더욱 단단해졌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생이라는 현실이 눈앞에 닥쳤을 때도 믿고 지지할 뿐 조급해하지 않았다. 시험 결과에 대해서도 격려만 할 뿐 다그치거나 혼내지 않았다. 성적표를 보자마자 울화통이 터질만한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믿어주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큰 조카는 원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둘째가 진로를 결정할 때가 온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아이의 현재 성적으로는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지만, 동생 부부는 크게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굳이 대학이 아니어도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개척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능력이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이도 대학에 큰 미련은 없었기에 어른들은 더 느긋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아이의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즐겁게 대학 생활을 하는 형을 보며 자극을 받은 건지, 친구 따라 강남을 가고 싶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조카는 느닷없이 대학 진학을 선언했다. 그것도 미대를! 날벼락이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조카의 바람과 성적이 완벽한 반비례였기 때문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조카의 그림 경력이라고는 유치원 때 잠깐 다닌 미술 학원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대학을, 그것도 미대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동생 부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두고 입시 미술을 시작하는 것이 너무 늦은 것도 같았고, 아이가 정말 미대를 진학할 만큼 실력이 되는 건지 알 수도 없었지만, 마음만은 간절하다는 것을 알고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급히 마련한 첫 대책은 조카가 유일하게 다니던 영어 학원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미술에 집중할 필요도 있었지만, 영어를 배우지 못한 건지 안 배운 건지 알 수 없는 성적을 남긴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 조치가 취해졌다. 그게 바로 나다. 5년이나 다닌 영어 학원의 결과가 8등급이고, 엉덩이조차 한없이 가벼운 조카가 혼자서 입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방치일 뿐이었다. 결국 조카의 엉덩이에 무게추를 달아주는 역할을 위해 내가 간택된 것이다. 성은이 망극할 노릇이었다.
조카가 초등학생일 때 잠깐씩 공부를 봐주고, 학비를 위해 과외를 해본 것이 낙점 요인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이야기고, 과외 경험은 기억 속에서 존재하지도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더구나 입시생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고양이처럼 맑은 눈빛과 간절한 목소리로 “고모가 도와주시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걸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입시라는 걸 제대로 지도해 본 적도 없으면서 분위기에 휩쓸려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
내가 저지른 일의 심각성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물은 제대로 엎질러진 정도가 아니라, 증발까지 해버린 상태였다. 비겁하지만 조금이라도 내 살길을 만들어야 했다. 동생 부부에게 못을 박았다. “내가 입시에 ‘입’자도 모르는 거 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공부할 때 옆에 조금씩 있어 주는 것뿐이야. 일 때문에 매일 도와줄 수도 없는데, 그래도 되겠어?”
“당연하지, 멘토처럼 필요한 조언만 조금 해주면 돼.”
하지만 한 아이의 인생이 걸린 입시를 어떻게 몇 마디 조언으로만 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지는 입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입시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턱 막혔다. 쥐뿔도 모르면서 입시의 세계에 '스스로' 던져져 버렸다는 사실에 한숨만 깊어갔다. 꿈도 꿔본 적 없는 입시지도, 그것도 미대 입시지도를 하게 될 줄이야! 과연 이 무시무시한 입시의 세계를 조카와 나는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 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와 함께 했던 입시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