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우면서도 때로는 가장 멀게 느껴지는 존재, 바로 가족이 아닐까요? 피를 나눈 사이라고는 해도 어떨 때는 남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만 같아 야속하기만 합니다. 언제 생겼을지 모를 가족 사이의 균열은 되돌릴 수 없는 큰 문제를 초래하기도 하지요.
여기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린 왕 영조와 그의 늦둥이 외아들로 고귀하게 태어나 가장 가혹한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이야기입니다.
한여름 뒤주에 갇힌 세자(I)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영조의 얼굴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습니다. 사도세자는 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왕 앞에 맨발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깊숙이 고개를 떨군 세자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로 여러 번 땅에 이마를 부딪혔습니다. 어느새 세자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난무했고, 이를 차마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세자의 어린 아들 세손이 아비의 곁으로 달려와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이러한 애처로운 광경도 영조의 굳은 결심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자결하라.” 믿을 수 없는 부왕의 말에 세자도 포기한 듯 그 명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신하들의 만류로 그마저도 할 수 없었지요. 이를 보다 못한 영조는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합니다. 그렇게 한여름 밤 뒤주에 갇힌 세자는 여드레의 밤을 보낸 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자는 세상을 등졌어도 영조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주면서도 세자의 지위에 맞는 제사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장례를 치를 때는 세손이 아비의 시신 앞에서 곡을 하고 예를 갖추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지요.
마치 영화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실려 있는 실화입니다. 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기록은 이 끔찍한 사건의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게 합니다.
부자 두 분이 성품이 다른데, 영조께서는 꼼꼼히 살피시며 재빠른 성품이시고, 세자께서는 과묵하시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시니라. 성품이 이처럼 다르니 세자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부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니라.
서로의 차이를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조선 시대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낳은 아버지와 아들, 그들에게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호랑이가 울부짖으니, 바람이 분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도 없는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보지 못했던 영조는 사도세자의 탄생 소식에 마치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사도세자는 미처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영조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불리던 이들을 세자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 후로도 영조는 정치를 돌보는 자리에 세자를 데려와 자랑하곤 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세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 경치를 구경하는 등 자상함도 잃지 않았습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영조의 특별한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세자도 총명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천자문을 배우던 세자는 ‘사치’라는 의미의 글자를 배우자 그대로 자신이 쓰고 있던 화려한 모자를 벗었고 그때부터 무명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영조와 저녁을 먹는데 영조가 말을 걸자 입에 있던 음식을 뱉고 대답했지요. 영특한 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점점 세자는 영조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와 같은 무예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지요. 세자는 자신의 처소에서 궁인들이 만들어 준 무기를 들고 전쟁놀이를 즐겨 했습니다. 더 자라서는 군대와 병법과 관련된 서적을 읽었습니다.
영조는 세자의 이러한 모습을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세자에게 “너가 지은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라는 글귀를 보고는 너의 기가 무척 강인하다는 걸 알았다.”라며 걱정했습니다. 글공부에서 멀어지는 세자를 지켜보며 애를 태우던 영조의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움 섞인 분노로 바뀌어 갔습니다.
불행의 서막, 대리청정
영조는 왜 이렇게 글공부에 집착한 걸까요? 영조의 어머니는 궁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 하던 미천한 출신의 궁인이었습니다. 이에 영조는 당시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던 노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절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운명이었지요.
영조의 아버지 숙종이 죽고 그 뒤를 이은 건 노론의 정적인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경종이었습니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서 배다른 형제인 경종과 영조는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경종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영조가 바친 음식을 먹은 다음날이었지요. 경종의 뒤를 이어 어렵게 왕위에 오른 뒤에도 영조에게는 ‘신분’과 ‘독살’이라는 꼬리표가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그 와중에 자신을 왕위에 올려 주었다며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려는 노론도 견제해야 했지요.
영조가 돌파구로 삼은 건 ‘학문’이었습니다. 영조는 어려운 국가고시를 통과하여 임용된 신하들을 휘어잡기 위해 날마다 독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외로운 터널을 홀로 꿋꿋이 지난 영조는 자신과는 달리 왕의 유일한 후계자로 떳떳하게 태어난 세자가 누구보다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는 더 큰 실망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세자가 14살이 되던 해, 영조는 세자에게 자신의 정무를 대신 도맡아 처리하라는 ‘대리청정’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히려 세자에게 독이 되었지요. 시작은 좋았습니다. 세자는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매 회의마다 세자의 뒤에 앉아있던 영조가 사사건건 세자의 결정에 트집을 잡았습니다. 의견을 물으면 가벼운 일도 혼자 처리하지 못한다며 핀잔을 주었고, 묻지 않으면 중요한 일을 허락 없이 결정한다며 화를 냈습니다. 어떻게 해도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자 세자는 초조해졌습니다.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갈 수 있다면(N)
시간이 지날수록 세자의 부담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우울한 일상 속에서 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악귀를 쫓는 경문이 적힌 도교 경전이었습니다. 현실을 잊고 싶었던 세자는 무속인들을 궁에 불러모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영조에게 심한 꾸중을 들은 날이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처소 밖에 있는 우물에 뛰어들려 하기도 했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다(F)
20대가 된 세자의 불안 증세는 더 심해졌습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 옷을 입을 때면 세자는 옷이 몸에 맞지 않다며 수십 벌의 옷을 찢어버리곤 했습니다. 세자의 불안이 궁인들에게 미치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더 심해졌습니다. 세자가 자신을 시중들던 내관을 살해하여 그 목을 들고 행패를 부린 것입니다. 세자는 수차례에 걸쳐 궁인들을 살해하고는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의 행동을 깊이 후회하곤 했습니다.
영조도 이러한 세자의 증세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불러다 꾸중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이르기도 했지만 세자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병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영조와 세자의 관계를 조용히 지켜보던 신하는 세자의 과오를 과도하게 꾸짖는 영조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며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부자의 관계는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습니다. 갑갑한 궁을 벗어나고 싶던 세자는 각종 비행을 저지르거나 아버지 몰래 20여 일 넘게 평양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행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영원히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P)
어느 날,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의 잘못을 낱낱이 적은 문서를 영조에게 바쳤습니다. 궁 밖으로 나가 놀면서 상인에게 빚을 얻는가 하면, 여승을 궁에 들였다는 등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적혀 있었지요. 그러나 영조의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은 세자가 반란을 꾀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영조는 성문을 엄히 닫고 세자가 즐겨 다니는 곳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았지요. 나경언은 세자를 모함한 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세자는 정말 영조를 해하려 했을까요? 혜경궁 홍씨의 증언에 따르면, 세자가 정신이 불안정할 때면 영조를 향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고 합니다. “칼을 들고 찾아가 어떻게든 해버리고 싶다.”라는 효도를 강조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차마 용서받을 수 없는 말도 했다고 하지요.
영화 사도의 한 장면(출처: 네이버 영화)
어찌 되었든 영조의 세자를 향한 마음은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세자의 친모 영빈과 대화를 나눈 영조는 이윽고 세자를 만나러 걸어 나갔고, 그렇게 사건은 벌어졌습니다. 극악으로 치달았던 부자간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비극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영조가 세자를 죽인 일을 끝내 후회했는가는 명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이후 세자의 아들이자 오늘날 우리에게 ‘정조’라는 묘호로 친숙한 세손의 간청으로, 뒤주 사건이 상세하게 적힌 『승정원일기』 기록의 일부를 지워 주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짧게나마 사도세자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호된 교육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던 영조에게 제 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세자(I), 도교 경전을 읽거나 갖가지 비행을 즐기며 현실을 도피하려고 했던 세자(N), 마음의 병을 얻어 궁인을 죽이는 등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던 세자(F),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세자(P).
사도세자의 MBTI는 인프피(INFP)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 가족,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그랬듯 누군가에겐 영원한 숙제이지 않을까 싶어요. 조금은 어두운 주제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좀 더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뜻깊은 연휴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 보았습니다 모두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
PS. GPT로 이미지를 생성하려 했는데, 너무 이상한 이미지들만 나와서 이번 편은 포기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