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깊은바다 상어유영
Oct 09. 2023
(육아일기) 9개월, 3차원의 세상에서 직립을 외치다
새싹이가 9개월이 될 즈음 셋이서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작년 이맘때 갔던 태교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같은 숙소를 예약했고 분유, 기저귀 등을 미리 택배로 보내놓아 짐도 많이 줄였다.
제주도 숙소에 누워 뒹굴뒹굴 햇살과 바람을 즐기고 있을 때 바닥을 기어다니던 새싹이가 갑자기 소파를 잡고 일어섰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그 찰나같던 순간을 기록에 남길 수는 없었다.
눕혀 놓으면 버둥거리며 제자리를 맴돌던 '점'과 같던 아이는 뒤집고 배밀이를 하며 '선 운동'을 시작했고 기어다니며 '2차원'의 세상을 알게됐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엄마가 커피도 마시고 잠시 책 읽을 여유가 있던 시기였다.
나의 달콤한 여유는 아이가 '3차원'을 발견한 후로 끝났다.
신대륙 발견에 비할 수 있을까?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인간의 두근거림?
새싹이는 잡고 서기 시작한 이후로 잠도 자려하지 않았다. 졸려서 눈을 부비면서도 앉았다 일어났다를 무한반복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그 희열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봤다.
사족보행을 하던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것과 같은 진화에 비할 수 있을까?
아이의 성장과 발달은 매 순간 조금씩 일어나는게 아니라 계단처럼 혁명적인 변화로 다가온다.
물론 아이 본인은 매일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고 있겠지만 첫 옹알이, 첫 뒤집기, 첫 배밀이, 첫 기기, 처음 잡고 일어서기는 너무나 놀라운 변화이고 그것은 양육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저녁 8시 이후 침대에 눕히고 쪽쪽이와 애착이불만으로 가능하던 잠들기는 이제 아기띠를 하고 한참을 업고 다녀야 가능해졌다. 자다가도 갑자기 일어섰고 잡고서기 며칠 후에는 두 손 떼기도 시도했다.
잠시 손을 떼고 서있을 때 나를 보던 아이의 얼굴에선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랑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일어서서 보이는 3차원 세상처럼 호기심도 몇 제곱 커진 모양이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긁어보고 쑤셔보고 밀어보고 입에 넣어보고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동원해 탐험과 발견의 기쁨을 표현한다.
아직 기고 서는 게 서툴러 머리를 찧고 넘어지는 아이에게 식탁, 싱크대, 서랍장, 티비장 등 세상 모든 게 갑자기 흉기로 변해버렸다.
만 44세 엄마는 잡고서기 한달만에 체력이 방전됐다. 아이가 겨우 기어다닐 때까지는 소서나 보행기에 태워놓고 집안일을 하고 울고 보채면 잠시 안아재우면 어느 정도 내 시간이 있었다. 그때 밥 먹고 유튜브를 보거나 인터넷 검색도 했다. 아이가 잘 놀면 유모차에 태워 도서관도 가고 동네 카페에서 커피도 사먹고 말 그대로 살만했다.
6개월 이유식, 8개월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장보기, 청소, 설거지의 부담이 커졌고 살림을 하고 나면 지쳐서 아이와 놀아줄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유식을 안먹고 거부하면 빨리 먹으라고 다그치고 기저귀 갈고 옷 입힐 때 안입겠다고 버티면 혼냈던 말투와 표정이 새싹이를 엄마보다 아빠와 더 친밀하게 만든 것 같다.
9개월 즈음 낯가림이 시작되니 아이는 눈 뜨자마자 아빠를 찾고 엄마인 나는 있는둥 없는둥 관심이 없다.
엄마 껌딱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냐고 말하지만 주양육자인 엄마에게 최고의 애착을 갖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만큼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고 서글프다.
하루 중 아이가 나를 정말로 필요로하는 안아줘, 놀아줘 타임에 나는 대부분 뒷모습으로 설거지를 하거나 뭔가를 하느라고 잠시만, 잠깐만 기다려봐를 외친다. 그렇다고 살림을 안하고 아이랑 놀아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잡고서기 시작하니 아이도 봐야하고 살림도 해야하니 둘 다 해내기가 버겁다.
9개월 들어서면서 부터는 하루종일 머리를 못빗는 날도 부지기수고 물 한잔을 마시기 힘든 날도 많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게 나의 외모인 것 같다.
아이가 자꾸 얼굴을 만지니 선크림도 바르기 어렵고 아이가 얼굴을 비비는 옷은 면티에 바지는 무조건 스판있는 체육복이다.
긴 머리는 출산 30일 즈음 숏커트로 자른 후 미용실 갈 시간이 없어서 6개월이나 지나서 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 원빈처럼 바리깡으로 밀어버리고 싶지만 가끔 거울 속 추레한 내 모습을 보면 서글퍼질 때가 많다.
원낙 꾸미는 것에 취미가 없긴했지만 내 생애 이토록 나에게 투자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지금은 외모보다 아이를 들고 안을 때 허리나 손목이 아프지 않도록 마사지 받고 운동할 여유가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고 아침에 일어나 발 딛을 때 통증이 없도록 살만 좀 빠졌으면 하는게 바람이다.
무엇보다 힘든 건 나만의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내 관심사에 대해 책을 읽거나 공부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기위해 찾고 알아가는 설레임이 내적 자극이 되어 외적자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무한반복되는 집안일과 육아로 그 순환이 끊어지니 지치고 일상이 재미가 없다.
설상가상 남편과의 다툼이 잦아졌다. 예전에는 말다툼도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로 감정이 상하고 섭섭했다. 빨대를 씻는 작은 솔이 늘 있던 자리에 없자 남편이 치운것 같아서 화가 버럭 났다. 어디다 뒀냐고 남편을 다그치고 손도 안댔다는 대답을 듣고도 화가 사그러지지 않았다. 한참 찾아보니 창틀 사이에 떨어진 것이었는데 그건 내가 잘못한 것이었다. 그때 내가 많이 예민하고 곤두서 있구나를 깨달았다.
남편도 회사일과 퇴근후 육아에 힘들기는 매한가지인데 서로가 힘드니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아이를 낳고 우리 부부의 주된 대화 주제는 내가 오늘 하루 얼마나 힘들었는지와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이다.
그나마 6개월까지는 아이가 보여준 새로운 행동과 귀여운 모습을 찍어둔 동영상을 봤었는데 말이다.
육아선배들께 물어보니 다들 9개월부터 돌 이후까지가 제일 힘든 시기라고 했다. 나만 힘든게 아니라는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돌 이후에는 아이에게 없던 고집이 생기면서 육체적 힘듦은 정신적 힘듦으로 대체된다는게 부연설명이었다.
10개월을 목전에 둔 지금 이순간 누군가 나에게 아이를 낳아야할지 말아야할지를 묻는다면 아이는 참 예쁘고 기존에는 몰랐던 행복감을 알게해주지만 그 댓가는 엄마와 아빠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갈아넣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밤은 내 영혼을 위해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자야겠다.
세상의 모든 육아 부모님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