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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Dec 14. 2020

가르치는 일에 대한 착각

하우스 헌터 House Hunters라는 미국 티비 시리즈가 있다. 은퇴 혹은 취업 등의 다양한 이유로 삶의 터전을 바꿀 때, 새로이 정착하게 될 도시의 부동산 중개업자가 고객의 희망사항을 고려한 후보 세 군데를 추천해 주는데, 그곳들을 같이 둘러본 뒤에 한 곳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행에서 볼 수 없는 각 도시의 주거 환경이나 렌트 비용 등을 들여다볼 수 있기도 하고, 집을 보러 다니는 사이사이 그 도시의 매력을 탐닉하는 장면들이 추가되기에, 자동 녹화를 설정해 두고 틈틈이 하나씩 챙겨 보곤 한다.


특히 우리는 하우스 헌터의 해외 편 House Hunters International을 녹화해 두고, 그 날 기분에 따라 "떠나고 싶은" 나라와 도시를 골라서 하나씩 구경한다. 한 에피소드가 20분 정도라서, 과제와 일에 지친 머리를 잠시 식히고 싶은 밤에 안성맞춤이다.


지난밤에는, 태국 편을 두 개 보았다. 하나는 젊은 여성이 방콕에서 지낼 곳을 찾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젊은 커플이 치앙마이에서 지낼 곳을 찾고 있었다. 방콕으로 간 여성은 잠들지 않는 화려한 밤 문화를 포기할 수 없어서 한 시간 거리의 출퇴근길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심에 살고 싶다고 어필했고, 치앙마이에 간 커플은 대학 졸업 후 무언가 드라마틱한 새로운 삶의 변화가 태국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소망했다.


미국인들이 미지의 세계이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양에서 살아보는 환상을 가지는 것, 이해한다. 특히 태국에 대한 로망은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 사이에도 흔하니까. 길거리에서 배부르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데 2달러면 충분하다는 그들의 감탄도 공감한다. 하지만 두 편의 에피소드 내내 엿볼 수 있었던 그리운 방콕과 치앙마이의 풍경에 대한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사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인들이 대부분 그렇다고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볼 수 있었듯이,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 미국 밖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태국에 장기간 머무를 수 있는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주 쉽게 말했다.


"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려고요."


방콕의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고 싶어서 태국으로의 이사를 감행한 젊은 여성은 집을 보러 다니는 내내 본인이 영어를 가르치게 될 곳에서부터 얼마나 멀어지든지 상관없어했다. 교통 체증이 전혀 없을 때 50분이 걸린다는 위치의 아파트가 본인의 예산에도 맞다며 마음에 들어하면서, 매일 아침의 교통비와 답이 없는 방콕의 트래픽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치앙마이에 간 커플의 경우, 여자는 이미 영어 강사로 취직이 되었지만 남자는 무직 상태로 그저 여자 친구를 따라온 터라 월세를 내기가 빠듯해 원룸 이상은 부담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만사 귀찮은 느릿한 말투와 무언가 초점 없이 말끝을 흐리는 그의 화법은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고, 집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여자 친구와도 감정싸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집을 선택하고 몇 달 뒤, 에필로그 장면에서 그 역시 영어 강사로 취직되어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각하면  마음만 답답해져서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 다시, 마음에서 일렁댔다.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누구나 뛰어들어 할 수 있는 일인가. 적어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서 태국에 가는 것과 태국에 가고 싶어서 가르치는 일을 하기로 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시도했던 화상 영어 수업에서도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미국에 살면서 화상 영어 수업이라니 무언가 아이러니하지만,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한 다른 대화가 아쉬워졌다.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 그런 것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내 마음대로 튜터를 골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화상 영어 플랫폼에 들어가서 낯선 사람들과 평범한 대화를 하면서 일상 영어 회화를 연습해 보겠다는 계산이었다.


결혼해서 아이슬란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소개란의 첫 번째 항목이 예일대를 졸업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겠지만 오로라도 봤겠죠?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는 말이 느렸고, 단어를 찾느라 종종 말을 멈추기도 했고, 느슨한 발음으로 인해 몇 번이나 '이 사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국 살이에 대한 공감을 나누며 서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대화를 종료하면서 나는 기분이 묘했다. 오래전 세이클럽 같은 랜덤 채팅방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인데, 나는 그에게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었다. 그의 부인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튜터링 사이트에 접속해서 대충 영어로 말 상대가 되어 주는 것으로 시간도 때우고 돈도 벌고, 그런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혼자서 태국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 태국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던 차에,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레슨 신청을 했다. 태국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아서 3개월에 한 번씩 비자 런을 하면서 어떻게든 미국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우스 헌터 방송에서 본 것처럼, 그 사람도 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태국을 사랑하는 것만큼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 물어본 뒤, 인터뷰를 하듯이 평소에 본인이 궁금했던 거라며 질문을 늘어놓았다. 카페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배경과 어울리게도, 그는 이 일을 카페에서 만난 친구와의 담소 시간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화상 영어 사이트에는 제2 외국어로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자격증이 실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과 수업을 해보았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자격증이 없는 사람들은 "영어로 말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이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학생이 연습하고 싶은 부분(발음 연습이나 리딩, 문법, 일상 표현, 스피치 연습 등등)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도와주려고 했고, 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자료나 사이트를 알려주었다. 자격증이 실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르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보여주는 것 같다.




예전에 중학교에서 근무하던 때에,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한 선생님이 중학교로 전근을 오셔서 같이 1학년 수업을 나누어했던 적이 있다. 음수 개념과 연산을 처음으로 배우는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탐구 활동으로 하루하루 진도가 빠듯하던 어느 날, 그 선생님께서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수학 책에 내용이 아무것도 없어. 너무 쉬워서 가르칠 게 없어. 한 10분 필기하면 그 날 가르칠 내용이 다 끝나."  


"너무 쉬운" 것은, 고등학교 수학에 익숙하신 선생님의 시선인 것이고, 학생들의 시선은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 선생님은 한 학기가 지나고 시험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깨달으셨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일을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이든, 특히나 성인이 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때에는, 그에 따르는 책임감과  무게를 인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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