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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Sep 01. 2021

계절의 사이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지루하고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다. 주택 단지를 벗어나 이차선 차로를 따라가다 보면 큰 도로와 연결되는 삼거리 신호등을 만난다. 좌회전을 하고 10분이면 B 다운타운으로 이어지고, 우회전으로 10분여를 달리면 H 다운타운에 닿는다. 그러니까 나는, B 마을과 H 마을 사이의 한가운데 어디쯤에 산다.


두 마을 모두, 마음에 쏙 드는 동네 카페가 하나씩 있고, 편하게 맥주 한 잔 곁들여 스낵을 먹을 수 있는 단골 바도 한 둘씩 있고, 서로 다른 매력으로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도서관도 하나씩 있고, 카페 체인점이나 대형 마트도 공평하게 있어서, 어떤 날은 B를 또 어떤 날은 H를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그날의 기분에 따르게 된다.       


엄밀히 행정적으로 따지면 H 마을로 주소지를 사용하지만, 나는 H 마을 주민이라고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B 마을 주민이라고 하는 것도 어색하다. 어쩐지 나는 H 주민인 동시에 B 주민인 것만 같은 오묘한 정체성이 오히려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쩌면 나는 그 어느 마을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지고, 그러면 괜히 쓸쓸해질 것 같아서 에잇, 모르겠다, 하고 생각을 접어 버리곤 한다.


오늘은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B 마을로 향했다. 오후에 화상 미팅을 끝내고 냉장고를 뒤져 늦은 점심을 적당히 챙겨 먹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고, 산책과 커피가 필요했다. B 마을에는 조그마한 호수와 그 둘레를 걸을 수 있는 고즈넉한 산책로가 있고, 그 산책로는 나의 단골 카페와 맞닿아 있으니, 오늘의 결정은 쉬웠다.


절반쯤 지났으려나, 사거리 신호등 앞에 서있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검은 구름이 심상치가 않다. 급하게 일기예보 앱을 확인하는 사이, 자동차의 앞 유리에 톡, 톡, 톡,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확인했을 때는 분명 없었던 거대한 비구름이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B마을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핸들을 돌렸다.


마침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을 하면 고속도로로 이어지기에,  길을 따라 비구름으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고, 다시 10 뒤에 나는 H 마을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은 쨍하게 파란 하늘이 하얀 구름을 대비시키고, 사람들은 강렬한 햇살을 피해 그늘 아래로 걷고 있었다. 유일하게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나의 자동차만이 동네 풍경에 스며들지 못하고 이질적이다.


순간의 현기증.


늘 가던 카페에서 늘 마시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사거리를 내다보는데, 문득, 이 쪽에도 저 쪽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존재가 도드라져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나는, 목요일에 태어난 아이의 숙명이라는 근사한 핑계를 방패 삼아 끊임없이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꿈꿨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닌, 완전히 문화가 다른 곳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끝없이 궁금했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고, 나는 충분히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리라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오게 되었다.


요즘의 나는, 한국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많이 한식을 챙겨 먹는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면 한국식당이 일 순위이고, 한국식당에서도 보기 힘든 부산돼지국밥은 그저 사진을 들여다보며 입맛을 다신다. 한국에서 살 때는 동네마다 치킨집이 너무 흔해서였을까, 일부러 찾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미국에 살면서는 왕복 세 시간을 운전해 한국식 양념치킨을 먹으러 다녀온 적도 있다. 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데, 입맛은 점점 더 한국인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제대로 한식을 먹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미국식을 즐기지도 못하는,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기분.


영어로 글쓰기가 막힐 때마다, 브런치 글쓰기 버튼을 눌러 한글 자판을 투닥댔다. 영어가 짧은 답답함이 종종 '나는 바보인가' 싶은 자괴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기에, 구구절절 맛깔나게 한국말을 실컷 쓰고 나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글이 모국어라고 해서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제2 외국어로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글쓰기는 한국어나 영어 같은 언어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그 생각이 글로 완성되는 것은 어렵다. 작가의 서랍에 끝내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쌓여간다. 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인데, 한국말로도 미국 말로도 글을 쓰지 못하는,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기분.


영리한 사람들은,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어정쩡한 기분이 아닌, 이 쪽에도 저 쪽에도 모두 속하는 풍요로움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어중간한 나의 존재감은 더욱 초라해진다.





그러니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 불편한 기분을 털어내고, 작가의 서랍을 열어 이 글을 다시 읽어보기까지 한 계절이 지나갔다. 유난히도 선선했던 여름이 저물었고, 해가 짧아졌다.


여름 내내, 토요일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B마을과 일요일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H마을을 마음이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독립기념일 이른 아침에는 B마을에 가서 배고픈 이들을 위한 자선모금 행사로 5k를 뛰었고, 여름 수확철이면 동네 축제가 벌어지는 H마을에 가서 커다란 멜론 한 통을 사 오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어느 마을에 속하는 것인가, 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함은 아마도, 그 질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수동성에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를 어느 마을에서 받아들여줄까 고민하는 대신, 내 마음에 두 마을을 심어놓기로 했다.


한국에 내가 속하는지, 미국에 내가 속하는지, 불안한 대신, 반대로 내 마음속에 한국에 대한 애정과 미국에 대한 애정을 차곡차곡 심어놓기로 했다.


한글로 글을 쓰는 일을 해야 하는지,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을 해야 하는지, 걱정하는 대신, 반대로 한국말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과 미국 말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내기로 했다.


뒤죽박죽, 때로는 너무 한국적이고, 때로는 너무 미국적인, 그래서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지라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왼쪽으로도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도 갈 수 있는,


지금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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