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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Nov 25. 2023

뉴올리언스 연가

싸구려 하우스 와인을 홀짝이면서 라이브 연주가 흐르는 재즈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을 사랑했다. 하루종일 사람들과 부대끼고 대화를 나누어야만 하는 일을 하던 때였고, 그렇게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다 쓰고 나면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다시 기운을 채워야만 하는 내향형 인간이라서, 약간의 와인 기운과 묵직한 베이스 연주가 있는 재즈바에 앉아 있는 일은 잉여의 시간이기보다 재생의 시간이었다. 주말이 가까워지면 라이브 공연 캘린더를 뒤적여 적당한 처방전을 스스로에게 내렸고, 가끔씩 낯설거나 익숙한 재즈바 구석 자리에서 그간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했다.


주말뿐 아니라 휴가도 비슷했다. 숙소 근처의 재즈바 몇 군데를 찾아내고, 라이브 연주 시간에 맞추어 그날의 일정을 조정하고, 와인 한 잔 앞에 놓고 앉아서 연주자의 몰입에 황홀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하다 보면, 그간의 일상에서 마음에 쌓였던 찌든 때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방콕에도, 비엔나에도, 프라하에도, 샌프란시스코에도, 틈만 나면 찾아가던 나만의 재즈바가 한 군데씩 있었다. 음악으로서의 재즈를 알고 들었다기보다는, 그저 그 시간과 공간이 주는 말없는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여행 중에 떠나는 휴가였다고 해야 할까,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조그만 아파트에 한 달 월세를 내고 지내던 그 해 겨울, 조촐한 보스턴 백 하나만 챙겨서 뉴올리언스를 다녀왔더랬다. 샌프란시스코에도 꽤나 멋진 재즈바가 여럿 있었지만 어쩐지 재즈의 고향이라는 뉴올리언스의 재즈바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고, 그때는 샌프란시스코 여행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미국에 올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가볍게, 뉴올리언스 재즈바에서 와인 한 잔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환상만으로 5일짜리 짧은 휴가를 계획하고 떠났다가 그곳의 유일무이한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거리를 걸어 다니는 내내 꿈속을 걷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뉴올리언스의 재즈와 재즈바와 남부 음식을 탐닉하면서도 휴가가 끝나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무엇이 그렇게도 꿈만 같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시절의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두려웠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너무 많은 비합리적인 관습 속에서 숨 막히는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축복이기보다는 주어진 삶의 기쁨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지혜로운 어른으로 멋지고 우아하게 자라고 싶었지만, 그런 욕심이 생기는 만큼 책임과 의무라는 이름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이 어쩐지 억울했다. 나이가 들수록 즐겁고 기쁜 일들을 향유하는 것을 (joie de vivre) 철없음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싫었다.


그런 나의 눈에 뉴올리언스는 백발 노부부가 히피 스타일 재즈바에서 연주를 듣다가 자연스럽게 블루스를 추고, 여자들끼리 90세 생일 기념 여행을 왔다는 할머니들이 고즈넉한 호텔 재즈바의 무대 바로 앞자리에서 연주자가 건네는 마이크에 대고 내년에 또 놀러 오겠다고 다짐하는 곳이었다.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고, 꿈을 꾸듯 그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로 음악을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을 마주하다 보니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나도 저들처럼, 나이가 들어도 재즈바를 찾아다니고, 낯선 도시를 탐험하고, 고요한 혼자의 사색과 평온한 어우러짐을 적절히 조율하면서, 무엇보다도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그런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고. 마법처럼 골목마다 음악과 예술이 가득한 이 도시를, 나만큼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구석구석 탐닉할 수 있는 밝은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 꼭,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그리고, 십 년이 지났다.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뉴올리언스의 프렌치쿼터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대로였다. 십 년 전에 내가 가보았던 모든 장소들이 여전히 건재하며, 오히려 더 유명해진 듯 사람들로 내내 북적이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정말이지 벅차오르는 감동이었다. 뉴올리언스의 매력이라는 것이 시간에 의해, 혹은 사람들에 의해 바래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십 년이 지나간 게 맞나 싶을 만큼 그곳은 그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더더욱 믿기 어려울 만큼 그대로였던 것은, 재즈 연주자들이었다. 십 년 전에 찍어 둔 사진을 보며 추억하던 그때 그곳의 연주자들을 길거리에서도 재즈바에서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렇게 뉴올리언스를 빛내고 있었다. 세상에.


설레는 마음으로 프렌치 쿼터의 버번 스트리트에서 가장 좋아했던 아주 작은 재즈바를 찾아갔다. 우연히도 그 재즈바의 공연 캘린더에서 낯익은 이름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십 년 전에 다른 재즈바에 우연히 들어섰다가 그대로 자리 잡고 앉아서 연주가 끝날 때까지 떠나지 못했던 날이 있었다. 그때 트럼펫을 연주하던 연주자는 중간의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내가 고마웠던지 다가와서 짧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뉴올리언스 토박이라며 식당 추천을 해주었고, 나는 짧은 휴가 중이라며 샌프란시스코의 재즈바 분위기를 전했다. 언젠가 서울에도 공연하러 오세요, 하고서 그의 CD 앨범에 사인을 받아왔었다. 그리고 종종 그의 앨범을 들으며 뉴올리언스를 추억해 왔다.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버번 스트리트의 작은 재즈바에서, 그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십 년 전처럼, 다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조그마한 재즈바에 빼곡하게 들어앉은 관객들은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내내 공연을 즐겼다. 구석 자리, 벽에 기대어 앉아서 나는 트럼펫 연주자와, 하우스 밴드와, 관객들이 모두 함께 만들어내는 행복한 뉴올리언스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예전보다 많이 살이 빠져 보였고,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지만, 하우스 밴드의 게스트 연주자로서 그는 아주 멋들어지게 트럼펫을 연주했다. 그리고, 십 년 전에 나를 자리에 주저앉혔던 곡, When you are smiling을 불러주었다. 당신이 웃으면 온 세상이 당신과 함께 웃어요 라는 노래 가사처럼,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에게는 십 년만인, 그에게는 처음인, 뉴올리언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그가 말했다. 언젠가 한 번은 뉴올리언스에 가봐야지 하고, 무슨 숙제처럼 미뤘던 여행지인데, 실제로 만난 뉴올리언스는 너무나 매력적이라서 몇 번이고 다시 찾아와서 그 깊은 매력을 하나씩 파헤쳐야 할 곳이라고.


이번 여행에서 내가 십 년 전 추억의 트럼펫 연주자를 다시 만나 새로운 추억을 새겼다면, 그는 십 년 후에도 기억에 남을만큼 멋진 추억을 길거리 클라리넷 연주자로부터 선물 받았다. 모든 행인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그녀가, 오직 그 만을 위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솔로 클라리넷 연주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에게도 뉴올리언스는 마음속 한 켠을 늘 따뜻하게 지켜 주는 장소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아서,


난, 십 년 전의 내 꿈을 이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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