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woHearted May 06. 2024

당신은 세도나에 다시 올 거예요

볼텍스와 요가

일곱 시에 시작하는 아침 요가에 늦지 않으려고, 알람을 맞추었다. 휴가 중에는 알람을 꺼두는 편이지만, 처음 가보는 요가원인 데다 그전에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부리려면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요가원 근처의 커피숍을 미리 찾아 두고 잠이 들었다.


왜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을까. 이렇게 개운하게 잠에서 깼는데, 생각하며 오 분쯤 더 누워 알람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침실 문 너머 거실의 큰 창으로 어렴풋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헉, 여행 첫날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알람도 듣지 못한 채 늦잠을 잤구나! 싶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 아직 알람이 울리기까지 이십 분이나 남았다. 휴, 알람 설정을 해제하고 요가복을 챙겨 입었다.


4월인데, 세도나는 이렇게 일찍부터 해가 뜨는구나. 깜깜한 새벽 운전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대낮처럼 환한 여섯 시의 세도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렸다. 아직 한산한 커피숍에서는 단골손님들과 직원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누었고, 하이킹을 나서는 듯한 사람들이 들어와 잠시 북적였다가 다시 한산해지기를 반복했다.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를, 낯설지만 싫지 않은 기분을 달래며 요가원 앞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십 년 전의 후기에서도 그 이름이 종종 눈에 띄어서 노련한 강사겠구나 싶었는데, 모르고 만났다면 그 경력을 몰라봤을 정도로 차분하고 수수한 느낌의 아가씨를 따라 야외 요가 장소로 향했다. 하이킹 트레일을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야생 허브를 손으로 쓰다듬어 냄새를 맡아보게 했고, 대략 3주 정도 온갖 종류의 꽃이 피어나는 이 계절의 세도나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요가를 할 거예요" 라며 그녀가 멈추어 선 곳은 트레일에서 조금 벗어난 작은 공간이었는데, 수강생 세 명이 나란히 요가 매트를 펼치기에 충분할 정도로 평평하고, 몇몇 선인장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했다. 정면으로 멀리 벨락 bell rock이 보이고, 그 옆으로 코트하우스 바위 courthouse butt와 대성당 바위 cathedral rock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에어포트 메사 airport mesa 뷰 포인트에 사람들이 줄지어 오르고, 한 명씩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courthouse butt & bell rock



야외에서 요가를 해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바다나 호수를 끼고 있는 휴양지의 호텔에는 이름만 들어도 근사한 "요가 온 더 비치 yoga on the beach" 같은 액티비티가 꼭 포함되어 있고, 초록으로 둘러 싸인 공원이나 리조트에서도 어렵지 않게 요가와 명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옆 동네의 그림처럼 잔잔한 호수에 패들보트를 타고 나가 그 위에서 요가를 해 본 적도 있고, 볕이 좋은 계절이면 뒷마당에 매트를 깔고 앉아 혼자서 수련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도나는 강력한 지구 자기장 vortex의 기운이 흐른다고 하니, 그런 곳에서 요가와 명상을 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동시에, 단지 세도나에서 요가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기를 느낀 것처럼 착각하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눈을 감고 명상으로 시작해서 몇 동작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한 시간이 지났나보다. 강사는 준비해 온 피리와 북을 꺼내어 사운드 힐링에서 들어봤던 아름다운 소리를 빚어냈고, 잔잔한 노래를 불러 사바아사나 자세로 쉬고 있는 영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온갖 잡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온전히 요가 동작에 집중했었구나 하고 느꼈다. 이렇게 마음과 머리를 텅 비우고 요가를 해본 것이 얼마만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나무 자세를 할 때였다. 벨락 bell rock을 멀리에 배경으로 두고, 그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나무 하나를 골라 시선을 집중했다. 한 발로 균형을 잡는데 내 몸이 전혀 기우뚱 대며 흔들리지 않았고, 올려 둔 왼 발이 무너지지 않았고, 넘어질까 불안한 마음도 일지 않았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오른발을 내려다보았다. 매트 아래의 붉은 땅과 나의 맨발이 연결되어 있는 걸까, 뿌리를 내린 것처럼 단단한 느낌이 올라왔다. 안정감. grounded. 호흡이 편안해졌다.


어릴 때는 별다른 집중을 하지 않아도 나무 자세만큼은 하루 종일이라도 서 있을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로 쉬운 동작이었는데, 요즘은 몇 달째, 나무 자세를 할 때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흐트러지곤 했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 걸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 지는 경험이 늘어나고, 나무 자세도 그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더랬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자연스럽고 단단하게 나무 자세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음에 감탄했고 감사했다. 그것을 세도나의 특별한 볼텍스 기운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빤한 플라시보 같지만.





그날 저녁, 산책 삼아 조금 멀리 있는 식당까지 걷기로 했다. 유명한 관광지인만큼 뻔한 미국식 레스토랑들에서 뻔한 음식을 먹게 될 줄 알았는데, 세도나는 까다로운 미식가들도 실망하지 않을 정도의 괜찮은 식당들이 많았다. 하지만 몇몇 식당은 바 bar 구역마저도 예약자만 받는다고 했고, 당일 예약을 받지 않는다는 곳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나니, 그 날 찾은 식당에서 우리를 내쫓지 않고 널찍한 바의 한쪽 코너에 앉게 해 준 것만으로 그 식당이 좋아졌다.


테라스 너머로 붉은 산이 보이고, 그 산이 노을에 물들 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식당 안쪽으로 따뜻한 주황빛이 들어와 사람들의 환한 얼굴에 에너지를 더했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장의 그림 같았다. 무슨 마법 가루를 뿌린 것처럼 포근한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어쩌면 그 식당은 은퇴 거주자들의 아지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혼자 마실 나오듯 걸어 나와서 햄버거와 맥주 한 잔 마시며 뉴스를 읽는 사람들, 친구나 친지가 방문해서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온 듯한 사람들, 집에서 일찍 저녁을 챙겨 먹고 가벼운 칵테일과 와인을 마시러 나온 노부부들. 그 속에 앉아서 메뉴를 정독하고 있자니 여행객 티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부부가 와인을 마시다가 단골 특유의 자신감으로 식당 메뉴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녀에게서는 식당의 모든 메뉴를 다 먹어 본 듯한 포스가 느껴졌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지는 것도, 음식 맛이 좋은 것도, 술 맛이 좋은 것도, 그리고 나무 자세의 안정감까지도, 어쩌면 모든 것이 세도나의 볼텍스 덕분이라고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볼텍스 효과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뭐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그가 "만약에 우리가 다시 세도나에 온다면"이라고 무슨 말을 시작하려는데, 내 옆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부인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또다시 세도나에 오게 될 거예요. 세도나는 그런 곳이에요."


세상에 좋은 곳들이, 가고 싶은 곳들이 너무 많은걸요, 하고 받아치는 그에게, 그녀는 인자한 교장 선생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만약은 없다고, 꼭 다시 오게 될 거라고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했다. 놀랍게도 그 부부는 우리 동네 주민이었다. 세상에, 세도나에 와서 우연히 들어온 식당 옆자리에서 동네 주민을 만난다고? 이것도 볼텍스가 이어준 인연인가! 하고 함께 웃었다. 그들은 여름이 아름다운 우리 동네의 본가와 겨울이 따뜻한 세도나의 별장을 오가며 지낸다고 했다. 벌써 십 수년을 그렇게 오갔어도, 세도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멋진 곳이라고 했다. 저토록 확신에 찬 평온한 미소라니, 뭔가 설득력이 있었다.




세도나에서 돌아온 날, 우리는 호텔에서 얻어 온 엽서를 냉장고 앞에 붙였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마그넷도, 병따개도, 메모지나 사진도,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었는데, 처음으로 세도나 엽서를 붙였다. 세도나에서 보낸 5일이 어땠는지 그 감상을 설명할 수 있기까지는 조금 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머지않아 또다시 세도나행 비행기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미 다음번에 지낼 호텔을 정해두었고, 이번에 단골이 된 식당 두 군데에 더해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식당들도 저장해 두었고, 오전 하이킹 코스와 오후 피크닉 장소도 골라두었다.


세상에 좋은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많다던 그는, 세탁기를 돌리며 영화를 보던 주말에 불쑥 고백하듯 말했다.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도나에 있는 동안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어. 꼭 또다시 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뉴올리언스 연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