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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Dec 29. 2023

펜션 사장이 되고 싶은 나정만 씨 - 3

얼마 전 서울 모임에 다녀온 아내는 입이 귀에 걸려서 돌아왔다. 한 동네 살던 친구 말에 따르면 현재 우리 집 아파트 시세가 10억쯤 한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 시세를  확인하곤 한다. ‘말이 시세 지 거래가 없는데 그게 무슨 시세냐? 그냥 거기 사는 사람들 희망사항이지’라고 쏘아 부치고 싶었지만, 모처럼 신난 아내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잠자코 들었다. 아내는 의기양양했다. “내가 집을 움켜쥐고 버틴 덕분에 1억은 그냥 벌었잖아. 당신이 무슨 재주로 사업을 해서 1억을 벌어? 아무튼 여자 말 들어서 망하는 법은 없다니까.” 


아내의 말에 욱하고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는 신중한 게 아니었군. 결국 나를 믿지 못하는 거였네. 무기력함 뒤에 숨어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치솟았다. “나 혼자 결정한 거야? 나 혼자 펜션 하기로 한 거냐고? 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말을 바꿔. 내가 1억을 벌지 못 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내가 집에서 노니까 병신으로 보여?” 


아내의 눈이 커다래졌다. 순식간에 눈동자에 물이 그렁그렁 고였다가 뚝뚝 떨어졌다. 아내가 운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언성을 높이고 과격한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나는 고스란히 가해자, 아내는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내 마음을 이해받을 기회는 사라졌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막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방에서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있을 정우가 떠올랐다. 더 흥분하기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세찬 바람이 얼굴에 따귀를 때린다. 점퍼를 챙겨 올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기엔 너무 세게 박차고 나왔다. 체면을 구기느니 차라리 감기에 걸리는 게 낫다. 아직 초겨울이니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주춤하는 사이 손을 벗어난 문이 바람에 세게 닫히면서 쾅 소리가 났다. 이 놈의 문짝! 힌지가 고장 나 문이 쾅쾅 닫히길래 수리공을 불렀는데, 며칠 내로 오겠다던 업자는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아내도 그 사실을 알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일부러 세게 닫았다고 생각하겠지. 억울하다. 여러모로.


바람은 춥고 갈 데도 없다. 이럴 때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담배도 없고, 4년이나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울 용기도 없다.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좀 세지만 빠르게 걸으면 몸이 덥혀질 것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  내가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아내의 눈물도 잦아들겠지. 그러고 나면 자신이 생각 없이 뱉은 말이 남편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겠지. 


20분쯤 걸었다. 바람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기온이 더 떨어졌다. 날은 이미 어둡다. 왜 가로등도 없는 이 쪽 길로 왔을까?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며 생각 없이 걸은 나 자신이 한심했다. 저 앞 가로등이 시작되는 곳까지만 가보고 다시 돌아가자. 까만 바탕에 흰 불빛이 나는 간판이 하나 서 있다. 카페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뛰다시피 걸었다.  <고요한 책다방>  




“죄송한데 영업 끝났어요.”  


이런 제길. 제주도 카페 사장들은 왜 남들 퇴근할 때 자기들도 퇴근을 하는가? 여기가 뉴질랜드인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지 얼마나 됐다고 다들 이렇게 설렁설렁 사는가?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한마디 할 용기는 없다. 내가 남의 영업 방침을 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나도 설렁설렁 살려고 제주도에 왔으니까. 


“휴~ 네.”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만큼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사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제가 20분 후에 나갈 건데 그 정도도 괜찮으시면 잠시 계셔도 돼요. 보이차 우려 놓은 것이 있어서 차는 그냥 드릴게요."  


여자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인상인데, 아는 얼굴은 아니다. 목소리가 상냥하고 친절하다. 하긴 와이프도 어디 가서 늘 상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밝은 목소리로 속없이 해대는 말들이 나에게는 가끔 가시가 된다. 일부러 먹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아마 내가 예민해져서 일 것이다. 근 1년을 백수로 지내면서 점점 불안이 커져가고 있다. 이 나이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다시 정규직으로 취직할 수도 없다. 그러려고 제주에 온 게 아니니까. 사업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의 자존감은 점점 밑천을 드러내고 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 아내는 왜 그 걸 모르는 걸까? 아파트 시세가 남편의 자존감보다 중요한가. 


“보이차 드셔 보셨어요? 이건 보이차 중에서도 숙차라고 해요. 습기와 열을 이용해서 부드럽게 발효시킨 차죠. 몇 잔 드시면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바람이 꽤 쌀쌀한데 차도, 외투도 없이… 근처에 사시나 봐요?” 

“네. 저 윗동네에 사는데 이 앞을 여러 번 지나다녔는데도, 여기 카페가 있는 줄 몰랐네요. 금세 갈 건데, 그냥 커피를 한 잔 파 실 수는 없나요?” 

“저흰 커피는 안 팔아요.” 

“아, 왜요? 찾는 사람 많지 않아요?”

“많죠. 처음 오시는 분들 열 분 중 여덟, 아홉은 커피 없냐고 하시죠.” 

“근데 왜…?” 

“그러게요. 저는 그래서 더 안 팔고 싶어 지더라고요. 이미 커피는 많이 드시니까, 여기서 만큼은 사람들이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보이차를 연한 아메리카노라고 생각하고 드셔 보세요. 생각보다 괜찮을 거예요.” 


여자의 이상한 논리에 갑자기 이 카페, 아니 찻집에 호기심이 동했다. 두툼한 방석이 깔린 마룻바닥이며, 구석구석을 메운 책들이며, 조용히 흘러나오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까지…. 


그녀는 유리 호리병 같은 곳에 담긴 뜨거운 보이차와 작은 찻잔을 찻상에 올려두고 살짝 미소 지으며 목례를 했다. 그러더니, 열 발자국쯤 떨어진 자리의 방석 위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무릎에 손등을 얹었다. 그 상태로 꼼짝하지 않았다. 명상을 하는 건가? 아무리 영업이 끝났다고 했지만, 손님을 앉혀 놓고 저게 뭐 하는 건가? 


보이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끈한 열감이 식도를 거쳐 위장에 닿는다. 옆에 보이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겉표지를 훑으며 보이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쓰지 않으면서도 구수한 것이 커피 대용으로 손색이 없다. 주인 여자를 흘끗 살폈다. 여전히 미동이 없다.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대고, 나도 눈을 감았다. 여긴 어딘가? 왜 내가 여기 있지? 불과 한 시간 만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책 표지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삶은 지금이다. 지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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