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희 Dec 20. 2024

거절을 못 해서

거절력 : 정중히 거절하는 힘


띠리리리 ~ 띠리리리 ~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남편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노안이 온 남편이 화면을 멀찌감치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얼핏 보니 제주도에서 축구하다 알게 된 강식이 형이다.


“네. 형. 네? 네에…. 예? 아… 네네. 네~”


남편의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왜? 무슨 일이야?”


“강식이 형 알지? 그 형 부인이 키르기스스탄 사람이잖아. 고향에서 사람들이 왔나 봐. 지금 서울인데, 내일 아침에 다들 제주도로 내려올 예정이래. 지금 강식이 형이 여기저기 관광시켜주고 있는데, 짬이 안 난다고 나한테 비행기 티켓 좀 예약해 달래.”


“몇 명인데?”


“열두 명“


“헐”


“여권 사진을 나한테 보내준대. 이름이랑 생년월일 하나하나 다 입력해야 돼. “


“헐, 헐, 헐. 키르기스스탄 이름 복잡하잖아.”


“그니까.”


“스펠링 하나라도 틀리면, 비행기 못 탈 텐데”



키르기스스탄의 흔한 이름들

Bakytbek Uulu Aibek

Arslanbek Osmonov

Aishe Gul Nurmatova

Tamir Akhmatov

Sadyr Japarov


ㅎㅎㅎㅎㅎ


“아~ 곤란하네. 나 때문에 비행기 못 타면 어떻게 해?”


남편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30년 만에 연락 온 지인이 제주도에 놀러 왔다며 잠깐 얼굴이나 보자고 하면 집에서 평균 시속 90km 속도로 한 시간 십오 분간 차를 몰아 서귀포 중문까지 가는 사람이다. 지인들이 지나가는 말로 맛집을 물어보면 느린 손으로 끙끙거리며 네이버를 검색해서 알려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남편이 용기를 내어 강식이 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형. 표 사면서 이름 하나하나 입력해야 하잖아요? 이건 여행사에 맡겨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네에~. 그렇지. 내일 당장 와야 하는데 너무 늦긴 했지. 그런데, 평소엔 이걸 누가 했어요? 아… 형이 직접? 근데 왜 저한테? 네? 네. 네. 아…. 네. 음… 저도 저녁에 일이 있어서, 끝나면 아홉 시 이후에나 시간 되는데, 암튼 그럼 여권 보내줘 봐요.”



거절 실패.



“오빠한테 부탁한 이유는 뭐래?”


“ ‘너, 영어 할 줄 알잖아.’ 이러네.”


"영어가 아니고 키르기스스탄어잖아."


"알파벳이니까."


"ㅋㅋㅋㅋㅋㅋ"

 


사정은 딱하지만 너무 웃겼다. 예스맨인 남편으로서는 최대의 복병을 만난 셈이다. 강국이 형에게 깃든 신이 남편에게 ‘자, 거절할 테면 해보게나.’ 하며 그의 거절력을 시험해 보는 듯했다.


남편은 (늘 그렇듯이) 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기왕 할 거면, 흔쾌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오….”


“대가를 기대하면 언제나 실망하게 되는 것 같아. 바라는 거 없이 그냥 해야지”


“오…”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감탄을 가장한 조롱이 아니라,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 자비로운 마음이 마치 내 생각이었던 것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맞아. 맞아. 내가 무언가를 베풀었는데 상대방이 갚지 않는다면 오히려 좋은 거랬어. 돌고 돌아 더 큰 무언가를 받게 되니까. 그걸 상생이라고 한 대. 그걸 믿고 흔쾌히 베풀면서 사는 것도 좋지.”


저녁 식사를 하며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남편과 함께 저녁에 해야 할 회사 일을 마치고 나니 밤 10시.

나는 곧장 침실로 향했다. “오빠 그럼 수고해.”


남편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그는 모바일 폰이나 컴퓨터로 하는 모든 일에 취약하다. 평소 대부분의 예약이나 사무 업무는 내가 하는 편이다. 열두 명의 키르기스스탄 여행객들의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일도 결국은 내가 도와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었나보다.


남편의 자비로운 마음을 칭찬할 수는 있지만, 내가 직접 그 일에 결부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격려의 의미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홀연히 2층에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약 한 시간 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남편이 방에 들어왔다. 피곤함과 홀가분함, 짜증과 자랑스러움이 다채롭게 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온 지 한 시간반 만에 점퍼를 벗으며 강식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내일 오전 10시. 1인 당 69,000원. 카톡으로 내역 보냈어요."


전화기 너머로 강식이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래. 수고했다. 그럼 그렇게 똑같이 23일 날 제주-김포행도 예약 좀 해줘.”


천진난만한 강식이 형.

강식이 형 안에 깃든 신이 남편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이래도 거절하지 않을 텐가?’



#거절을못해서 #공덕을쌓는중


2024.12.19

이연ㅎㅎㅎ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