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보부상의 깨달음
앞선 글에서 나는 '벌새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다양한 꿀을 빨아 본 덕분에, 그 경험을 이리저리 조합하여 사업을 잘할 수 있게 됐다.'라고 썼다. 그렇다.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 오늘은 내가 겪어 본 중 가장 비애감을 느꼈던 일에서 얻은 교훈에 대해 써볼까 한다.
'주간 만화 잡지'를 파는 일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했던 아르바이트다. <프리랜서 판매직 모집>이라는 지역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 간 회사의 사무실은 부천의 어느 허름한 건물 3층이었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대학생 몇 명과 집 나온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들 서너 명, 그 계통에서 왠지 잔뼈가 굵어 보이는 아줌마들이 둥글게 모여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2인 1조로 지역을 정하고, 한 사람당 20부씩 잡지를 들고나가 알아서 팔면 된다고 했다. 판매가는 2,500원, 한 권을 팔면 권당 1,000원을 준다고 했다. 다 팔고 사무실에 전화를 하면 팀장님이 책을 더 갖다 준단다. 열심히 하면 하루 50권은 팔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아르바이트생 평균 시급이 1,700원~2,000원 사이였다. 하루에 열 시간 일해도 2만 원을 버는 시절이었다. 50권을 다 팔면 5만 원! 나는 흥분했다.
배낭에 잡지를 짊어지고, 부천역 근처로 향했다. 아무래도 역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출구 앞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팔아볼 생각이었다. 막상 팔려고 하니 무척 창피했다. 학교 선배나 동기들이 지나가다 보면 나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나는 당시 도도하기로 유명한 항공운항과 재학생이었다. 우리 과 애들은 평소에도 스튜어디스처럼 풀메이크업을 하고 학교에 다녔다. 내가 역 앞에서 만화 잡지를 팔고 있더라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항공운항과의 명예를 실추시킨 혐의로 고소당할 수도 있었다. (하하, 말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잡지 판매상처럼 보이지 않도록, 책을 한 권만 들고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아무도 내가 책을 파는지 모를 것이기에, 행인들에게 "2,500원입니다!" 하며 잡지를 내밀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망설이며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 같다. 반대편 출구에서 책을 팔기로 한 같은 조 학생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책을 반납하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딱 다섯 권만 팔아보자' 마음을 먹었다. 왔다 갔다 한 버스값은 벌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이는 아저씨마다 다가가 "만화잡지 한 권 보세요."라고 판매를 시도했다. 선정적인 표지로 미루어 여자들은 사 줄 것 같지 않았고, 젊은 남자들에게는 도저히 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만만한 것이 중년 아저씨들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들도 '얘는 뭐냐?' 하는 표정으로 쌩 가버리거나, 느물 느물하게 웃으며 수작이나 걸어올 뿐 쉽게 지갑을 열지는 않았다.
날은 저물어 가고, 배도 고팠다. (사실 그렇게까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장면에서는 꼭 날이 저물고 배가 고프지 않던가요?) 터덜터덜 걷다가, 문 열린 부동산 앞을 지나게 됐다. 안에는 서너 명의 아저씨들이 뿌옇게 담배를 피우며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화투가 깔린 담요 아래 수북이 쌓인 지폐가 보였다. 순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영혼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여기다!'
최대한 불쌍한 모드로 화투판 앞에 섰다. (노력하지 않아도 불쌍해 보였겠지만) "아저씨. 죄송합니다. 저는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인데요, 여기 손님용으로 잡지 몇 권 비치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 권에 2,500원이에요."
한 아저씨가 낄낄거리며 "야, 돈 딴 놈이 좀 사줘라."하고 맞은편에 앉은 아저씨 방석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휙 꺼내 내미셨다.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꾸벅 절이 나왔다. 책 네 권을 건네자, 돈을 뺏긴 아저씨가 필요 없으니 두 권만 놓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자, 한 아저씨가 "왜 그래? 나도 가져가서 보게." 했다. 호탕한 아저씨가 "에헤~ 참. 각자 사서 봐." 하며 또 두 번째 아저씨 방석에서 5,000원을 휙 꺼내 나에게 주셨다. 이런 것을 일타 육피라고 하던가?
나는 그날의 경험을 통해 중대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돈을 벌려면 돈이 흐르는 곳으로 가라.'
이후 나는 부동산, 오토바이 가게, 시장통 (주로, 기름과 얼음 배달하는 집) 등 온갖 고스톱 판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리고 잡지 판매왕 자리에 등극! 까지는 아니지만 다른 학생들에 비해 꽤 많은 부수를 팔았다. 하지만, 오래 할만한 일은 아이었기에 며칠 후 그만두었다.
돌이켜보면 참 아련한 추억이다. 당시 내 나이 스무 살.
그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건 내 인생의 시작점일 뿐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비참하고 슬픈 기분은 아주 잠깐이고 재미와 희망을 더 많이 느꼈다.
27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다. 시작 점에서는 많이 걸어왔지만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그리고 여전히, 크고 작은 고난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그 교훈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는 스무 살의 나보다 훨씬 삶에 노련해졌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난다면 아무런 얘기도 해 주지 않을 것 같다.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까. 그리고, 미리 다 알면 재미없으니까.
- 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