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내 입술이 닿은 코코아 종이컵에
그가 입술을 대고 마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느라
밤 잠을 설치던 시절.
유재하 앨범을 수십 번씩 돌려 들으며
그의 이름을 노트에 끄적이고
그가 타던 버스 정류장 앞을 서성이느라
오후 한 나절을 다 보내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던 시절
전화통을 붙들고 이불 속에 들어가
웃고 토라지고 웃기를 반복하다가
네가 먼저 끊으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수화기를 귀에 얹고 잠들던
어린 연애의 기억.
다시는 오지 않을 풋풋했던 시절.
소녀를 지나
여자가 되었을 무렵
모르는 남자의 흘깃거리는 시선은
내심 얼마나 짜릿했던가.
나에게 반한게 틀림없다고
얼마나 한치의 의심 없이
자신만만했던가.
허벅지가 굵고
허리가 날씬했던 나는,
마음껏 춤추고, 웃고
수줍은 척 순진한 척
그들을 유혹하던 나는
점점 흐릿해지다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랜 세월 지속된 중력의 힘이
몸과 함께 마음도 내려 앉혔는가.
이제는 집에 누워
혼자 책이나 보는 것이 제일 좋다.
좀처럼 마을 설렐 일 없는
아줌마가 된 것이
편하면서도 아쉽고
아쉬우면서도 편하고…
그러다, 가끔은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배에 튼살이 있을 리 없는
파릇한 아가씨들을 보며
더 이상 그들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이 더위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는 연인들을 보며
'참 이쁠 때다.' 하다가,
문득 나 자신이 세상일에 한 발 물러나 앉은
늙은 고양이 같다고 생각될 때.
혼자 맥주를 따,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원산지와 수입원, 원료표 따위를 읽고 있는
오늘 같은 밤
나는
쓸쓸해지다가 피식 웃음이 나고,
또 피식 웃다가 쓸쓸해진다.
* 맥주를 마시다가, 오랜만에 시 한수 끄적여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