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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 엄마는 책상도 있구나.

by 레이지마마

초등학교 때 친구네 집에 갔는데, 거실 한 구석에 작은 나무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 몇 권과 스케치북, 노트와 펜통이 정갈하게 정리된 모습이 왠지 모르게 눈길을 끌었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엄마 책상이라고 했다.


엄마 책상이라고?

엄마 재봉틀, 엄마 장롱, 엄마 그릇 같은 건 들어봤어도

책상이 있는 엄마는 처음이었다.


부러웠다.

친구네 집 방이 두 개인 것보다

책상이 있는 엄마를 가진 친구에게

나는 묘한 질투를 느꼈다.

.


그 부러움의 정체는 뭐였을까?


나만의 책상이 있다는 건

엄마나 아내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시간을 가진다는 뜻이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엄마는 흔치 않았다.

적어도 우리 엄마에겐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먼 훗날 우연히 엄마의 수첩을 봤다.

계좌번호나 전화번호, 친지의 생일 등을 적어놓는 수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작은 일기장이었다. 간간히 짧은 일상의 기록과 감상, 좋은 노래 가삿말, 명언 등이 적혀있었다. 엄마가 달리 보였다. 처음 엿본 엄마의 세계는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든든했다.

.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내가 경험한 일들, 내가 겪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의 입장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의 세계는 생각보다 흐물흐물해서, 글이나 그림이나 낙서로라도 찬찬히 굳혀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이기 쉽다.


나의 세계가 견고하지 않으면, 타인의 세계관에 쉽게 휘둘릴 수 밖에 없다. 정리되지 않은 나의 마음 속에 답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보다, 나의 기쁨과 슬픔을 자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다. 그게 쉬우니까.


.


엄마가 된 지 20년이 넘었다.

아이들이 다 나가 살고, 집이 텅 비었다.


하지만 나에겐 책상이 있다.

내가 그린 그림, 나를 위한 편지,

은밀한 다짐 같은 것들을

쓰고 읽고 모아둘 수 있는 곳.

책상은 내가 나와 만나는 곳이고,

나와 친해질 수 있는 곳이다.

많은 시간 혼자 지내지먄,

그닥 쓸쓸하지 않은 이유이다.


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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