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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잉하리 Jun 25. 2020

불안 등급이 1단계 상승했습니다.

우리 애는 별거 안 해요. 미술, 태권도, 피아노, 영어 이게 다인데요?

이른 퇴근길, 딸이 공부하는 학원을 지나쳐온다. 겨우 2학년인 딸은 며칠 전 생애 네 번째 학원에 등록했다. 주변의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미술, 피아노 등 예체능으로 학원 세계에 첫발을 담갔고, 일하는 엄마들의 아이들이 응당 그러듯 태권도 학원 차를 하교 차량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딸 입에서 오늘 한번 좀 빠지면 안되겠냐 볼멘 소리도 나오게 될 '진짜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원장과 상담 후에 학원 등록을 하며 그제야 학원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한 달 원비가 26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퍽이나 놀랐다.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 보다야 비싸겠거니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한 금액을 훨씬 웃돌았다. 그 얘길 남편에게 하니 그 사람도 '그렇게나?!' 하는 반응이다. 


 오늘 동료들에게 애 학원이 이렇게나 비싸더라 얘길 하니, 놀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원래 그 정도 해, 내가 5년 전 우리 아들 보낼 때도 24만원이었어."

 '10년 전에도 우리 애가 다닐 때도 25만원이었다. 어느 동네는 더 비싸다' 등의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나는 '나랑 내 남편만 몰랐구나'하며 웃어넘겼다.


학원비를 결재하고 나오는 길 배달시켜 먹는 우유를 끊을까 쥐꼬리만 한 월드비전 정기후원을 그만둘까 잠시 망설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내후년 둘째가 일 학년에 입학하면, 잠깐 휴직을 할까?, '몇 년 더 일하고 애들 좀 더 크면 1년 자율연수 휴직을 할까?' 출근 가방에 숨겨 가끔씩 꺼내보던, 생각만으로도 나를 들뜨게 했던 작지 않은 희망사항을 가방 더 깊숙한 곳으로 눌러놔야 할 것 같았다.


 학교에서 반 아이들과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오는 길에 펼쳐지는 흔한 광경이 있다. 어지간하면 의견 일치가 어려운 아이들이 마음을 다해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을 싣고 학교로 돌아가는 차가 고장 나거나 길이 막혀 도착이 늦어지는 것이다.  별 무리 없이 도로를 빠져나와 아이들의 눈에 익숙한 길이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전화기가 바빠진다.  오늘 하루 학원 좀 빠지면 안 되겠냐는 애원에 가까운 질문 후에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 녀석도 있지만, 계획 실패로 좌절을 하는 녀석들이 더 많다. 


 아이들이 질색하는 그 '학원'이라는 곳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얼마나 고된 노동의 시간을 보내는지 그 애들이 알리가 없다. 애들이 질색하는 걸 알면서도, 매번 '텅장'이 되어버리는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사교육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대한민국 부모들이 정말 딱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부모들의 대열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극성스럽게 아이 삶을 재단하고 싶지 않지만 내 아이가 열등생이 되는걸 그냥 견딜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고백하건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내가 정독한 책도 독서머리 공부법이었다. 내 딸을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 좀 더 솔직하자면 독서를 통해 이해력과 사고력을 풍부하게 갖춘 '공부 잘하는 아이'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내 아이의 성적이 내 체면이 되고, 내 아이의 입시 결과가 내 자존심이 되는 나라에서 그런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예전에 봤던 입시와 사교육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수치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자식을 대학에 입학시킬 때까지 일반 가정에서 사교육비로 쓰는 막대한 지출에는 헉하는 마음이 들었고, 가족의 잃어버린 저녁식사, 일상적인 대화의 부재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안타까워했었다. 입시 전쟁을 위해 우리가 놓치는 소중한 것들...... 그러나 그 많은 희생에도 불과하고, 그 끝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버린 돈과 시간, 행복들은 다 어디로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걸까?


 한심하게도 승자 없는 싸움에 뛰어들었다. 내년부터 학교 교육과정에서 영어가 정규 교과로 다뤄진다는 사실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내가 뭐 많은 것을 바라나? 남들만큼만 알고 가자는 거지. 공부 못하면 뭐 할 건데, 그나마 공부로 성공하는 게 제일 쉽지'라는 합리화가 나를 등 떠밀었다.  주변에서 다 하는 영어 공부, 우리 애만 너무 늦은 것 같다는 불안감이 한 달 26만원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학원비를 눈감아 넘기게 했다.


  이왕 시작한 공부, 어쨌든 다녀야 하는 학교, 입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니 내 딸이 잘해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둘 모두가  '이건 정말 아니다. 이게 뭐니?'라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너무 늦기 전에 발을 빼자고 결심한다. 들어갈 때 내 맘대로 들어갔으니, 끝내는 것도 질질 끌지 말고 한방에!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저당 잡히지 말자. 나도 그리 빛나는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어라? 그런 나도 봐줄 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걸 보면, 공부가 진짜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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