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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부슬 Jun 06. 2021

우리 사회의 고등학생은 언제까지 닥치고 공부해야 할까

김상봉의 <학벌사회>를 읽으며 일어난 각종 번민에 대하여


  지난 2주간 일기도, 시도, 브런치용 글도, 어떤 종류의 글도 쓰지 않았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지만, 어떤 문장도 배출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나는 김상봉의 <학벌사회>라는 책을 읽었는데, 아마도 글을 쓰지 못했던 건 이 책 때문인 것 같다. 학생으로, 또 교사로 '학교'라는 공간은 질기게 내 인생과 엮여 있고, 따라서 '교육'이라는 화두는 늘 따갑고 먹먹하다. 이 책은 나의 온갖 과거와 미래를 뒤죽박죽 소환시켰다.




  <학벌사회>는 2004년, 그러니까 무려 17년 전에 세상에 나온 책이다. 김상봉이 학벌사회의 폐해와 대안에 대해 두툼한 책으로 설파할 2004년 당시, 나는 열일곱 살, 고1이었다. 나는 학벌사회의 충실한 수능 노예로 살고 있었다. 주변의 여러 어른들은 틈만 나면 잔뜩 심각한 얼굴을 하고 겁을 줬다.
  "고등학교 때 닥치고 공부하지 않으면, 가난하고 찌질하고 음침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까 공부, 공부, 닥치고 공부해!"
대략 이런 식으로.


  자고 먹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고,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하며 보냈다. 등하교 길에는 영어 듣기를 했고, 밥을 먹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의 풀이법을 찾아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당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는 대부분 정시로 대학에 갔고, 정시형 학교의 유일한 대입 성공전략은 학생들을 자습실에 오랜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도록 가두어 두는 것이다. 1학년 때는 밤 10시, 2학년 때는 11시, 3학년 때는 12시에 하교를 했다.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이고 공휴일에도 학교에서 자습을 했다. 학교 측의 배려로 토요일에는 6시에 하교를 했는데, 아마도 우리를 향한 배려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급식실 여사님들도 토요일 저녁만큼은 가족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엔 근처 도서관에 갔다. 못다 푼 문제를 마저 풀고, 까만 밤의 색을 보며 집에 갔다. 그게 뿌듯하다고 느꼈다. 뇌에 빈틈을 주지 않고 문제들을 욱여넣어야 하루를 잘 살았다 여겼다. 매일 무거운 머리통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쓰러져 잤다. 잠도 바빴다. 가위에 자주 눌렸다. 모든 시간은 수능을 위해서 썼다. 나는 본분을 다할 뿐이었다.



  책상 위는 문제집의 공간이고, 문제집을 푸는데 방해되는 것들은 책상 아래에 처박아 두었다. 소질과 취향과 진로에 대한 고민, 지금은 모두 불태워버려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일기들, 심야의 라디오, 짝사랑의 애절함을 노래하는 가요들, 여고생의 내면에서 울렁꿀렁 솟아오르는 각종 감정들에게 책상 위를 내줄 수는 없었다. 우월감, 열등감, 경쟁심, 의아함, 불안함, 패배감, 좌절감, 우울감,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가끔은 책상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기도 했지만, 그 장면을 누구에게도 들키지는 않았다.


  나의 대학 입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대에 합격했기 때문에.


  대학생 신분, 그 자체는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지만, 사람의 오랜 관습이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쓸모없는 감정, 의문,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구겨 구석진 곳에 던져두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은 언제나 유한하므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때가 오고 만다.




  4학년 2학기에 휴학을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임용을 준비하거나 다른 고시를 준비하거나 스펙을 쌓거나 해외연수를 가기 위해서 휴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휴학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휴학을 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빈 시간. 빈 시간에 나는 정처 없이 거리를 걷거나, 아니면 울었다. 목을 놓아 울었다. 체내 수분이 모두 말라버릴 듯, 자주 울었다. 그간 책상 아래에 대충 쑤셔 넣어두었던 온갖 것들이 녹아 흘러나오는 것이었을까. 그 울음들은 삭을 대로 삭은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나와서 증발했어야, 수증기가 되거나 구름이 되거나 비가 되거나 강물이 되거나, 이미 다른 물이 되었어야 했던 것들인데 너무 오랫동안 묵어 삭아버린.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자기가 배운 많은 것들을 삶 속에서 반성하고 검증할 수도 없으며, 누구와도 참된 만남과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곳에서 배움이란 자유로운 정신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타자적 지식과 소외된 진리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때 인간은 앎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거꾸로 지식과 정보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이 생각의 근원적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화될 때에는 정신의 다른 모든 재능들 역시 고사될 수밖에 없다. 그때에는 상상력과 창조성이 억압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어떤 창의적 재능이 꽃필 수도 없으며 학문의 진보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의 학생들을 '공부'를 핑계로 학대하여 얻는 소득인 것이다. (김상봉, <학벌사회>, 239쪽)


  삭고 낡은 것들을 한껏 비우고 나서, 비로소 나는 '나'에 대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어떤 진정한 의미의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일기를 썼다. 꿈을 분석했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복기했다. 나를 휩쓸고 간 감정들을 구기지 않고 문장으로 써내려 갔다. 구겨서 버린 것들을 조심스레 다시 펴보기도 했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지, 좋은 교육자란 무엇인지, 공교육과 대안교육 중 어느 곳에 몸을 담아야 할지 등 거칠고 초보적인 고민이었지만, 일기를 쓰며 스스로와 대화하고, 대안교육 현장에 가보기도 했다.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두고서야, 누군가의 겁박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공부가 시작된 셈이다.




  이후 여러 굴곡과 휘청거림이 있었고, 어쨌든 현재는 공교육 현장의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되었다는 말은 학생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이 사실은 너무 무섭고 슬프다. 나는 도무지 학생들에게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언제나 닥치고 공부하는 게 최선이라고 충고했고, 그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었던 나는 대학입시에 성공했으며, 그때 익힌 습관으로 교사임용시험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다.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자본이 학벌보다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대입의 실패가 인생 실패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고, 고등학교에서의 시험 성적이 한 사람의 전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는다.



  2개월 후면 복직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구기지 말라고, 의문과 고민과 감정의 동요를 억누르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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