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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bydick Feb 22. 2023

위장전입의 추억

첫 아이가 과천에서 유치원에 다닐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있다. 그 아이네 집과는 금방 친해지게 되었는데, 엄마들끼리 얘기하다가 둘이 초등학교 동창인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단, 그 둘은 졸업하기 전까지 서로 모르는 사이긴 했으나), 그 아이가 주말마다 놀러가던 할아버지 댁이 내가 자랐던 과천동 본가(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살고 계시는)와 같은 동네인 것도 알게 되었다. 여러 모로 인연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어느 토요일 오후 두 집이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워터파크를 갔다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고, 당시 직장을 옮겨 주말까지 일하던 나는 늦게 도착해 합석을 하며 처음 그 집 엄마, 아빠를 보게 되었다. 그 집 아빠는 나보다 네 살이 많았는데,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가 내가 졸업한 강남 8학군의 B중학교를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 말-90년대 초는 강남 8학군 중,고교의 인기가 대단해서 과천에 살면서 강남 8학군의 중학교에 배정받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교육 여건이 열악한 과천에서 중, 고교를 보낼 것을 염려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는 과천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나서 당시 방배동에 있던 친척 집 주소지로 어머니와 함께 위장전입을 하여 방배동에 있는 E 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보낸 이후 비로소 B 중학교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위장전입을 하면서 다녔던 3년간의 중학교 시절은 어쩔 수 없이 해야했던 거짓말과 그로 인한 떳떳하지 못함으로 남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어둠의 시간으로 남아있었는데, 나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4년 앞서 비슷하게 위장전입을 해 B 중학교에 다녔던 동지를 예상치 못하게 만나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하기 어려웠던, 내 마음 속 응어리진 아픈 경험을 웃고 떠들면서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 것이 어찌나 놀랍고 반갑던지. 


멀리 위치한 중학교까지 한 번에 가는 몇 안되는 버스노선의 번호들, 생활기록부에 전화번호까지 거짓으로 적어낼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직장 전화번호를 적어내서 생긴 웃픈 일, 매 달 시험 성적표를 찾으러 친척집을 찾아가던 일, 친구들을 피해 다니던 등하교길의 추억 등 지금은 배를 움켜쥐고 웃는 에피소드들 하나 하나가 그때는 나를 몹시도 힘들게 한, 신경쇠약을 불러올 만큼 심각한 고민들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보내는 동안 공부도 잘 하고 매 학년 부반장, 회장, 반장을 거치면서 선생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친구들을 좋아하던, 그래서 자신감이 충만하고 때로는 선을 넘어 나대기까지 하던 나는 위장전입을 하면서 보낸 낯선 서울에서의 4년 동안 큰 상처를 받았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 당시 내게 무엇보다 큰 상처가 되었던 것은,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까지 우리 집이 어디인지 솔직히 얘기하지 못하고 피하거나 거짓말을 해야했던 점이었다.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중학교 친구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주소지와 관련된 질문이 나올까봐 항상 조마조마해야했고, 과천에서 오가는 것을 친구들이 알게될까봐 등하교 때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친구들을 따돌리고 혼자 돌아가야했던 그 시절은 나를 무척이나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성격으로 바꿔놓았다고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때의 나는 오가는 버스 속 사람들이 내 머릿속 생각을 읽고 있을 거라는 망상에 떨기도 했고, 성적도 많이 떨어진 가운데 가끔 전교 1등을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버지가 학교에 부탁을 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가 1등을 한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기도 했다. 지금껏 집안 식구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을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다. 누구도 이런 어려움을 공감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고, 반대로 누구도 내게 이런 어려움이 있냐고 물어보지 않기도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내가 이런 사소한 것에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돌이켜보건데, 그 시절의 외로웠던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음악과 영화, 프라모델, 자동차에 매혹되어 해오던 소소한 덕질 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위장전입은 중3이던 가을 교육청 실사에서 내가 위장전입된 주소지에 살고 있지 않음이 확인되어 결국 고등학교를 정작 관악구의 I 고등학교로 배정받으면서 비로소 끝이 나게 되었다. 그동안 경기도의 비평준화 정책 덕분에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할 무렵에는 과천과 안양의 고등학교들의 입시 결과가 강남 8학군 못지 않거나 더 나아지게 되었고, 굳이 입시 성적이 좋지도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I 고등학교에 다닐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I 고등학교에 다닌지 2주 정도 되었을 무렵 어느날 아버지가 찾아오셔서 전학 수속을 밟으셨고, 그렇게 그날로 나는 K 고등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 와중에, 어차피 2주만 다니고서 전학을 가게 될 거라 교복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어른들 생각에 2주 동안 다른 학생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가운데 혼자 사복을 입고 다니는 참극(?)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이다. 그 이후, 다시 과천에서 보내게 된 고등학교 시절은 즐겁고 자신만만했던 초등학교 시절로의 회귀와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알던 많은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면학 분위기가 좋은 학교에서 순하고 성실하던 친구들과 지내면서 나는 다시 정서적인 안정감과 행복을 되찾게 되었다. 매일 웃는 얼굴로 지내던 내게 친구들이 스마일맨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큼. 


국무위원 청문회 때가 되면 어김 없이 자녀 교육을 위해 위장전입을 했다는 변명과 그에 맞선 질타를 뉴스를 통해 듣게 된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 내 머릿 속은 서울에서 보낸 그 어둡고 힘들던 시절로 되돌아간다. 종점부터 종점까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불안한 마음 가득 학교를 다니던 자신감 없고 위축된 한 소년이 보인다. 위로받지 못한 마음을 홀로 달래던 내가 보인다. 내 마음의 눈은 청문회장에서 질타를 받고 있는 후보자에게 있지 않고, 힘들어하고 있을, 그러나 누군지 모를 그 아이에게 가 있다. 30년 전의 나와 달리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른다. 부디 잘 지내고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어쩌면 위장전입이 아니라, 마음 속 모순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할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문제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의 내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보건대 역시 그 나이 아이의 머리와 마음이란 그런 모순을 빻아없앨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여물지 못한 것이 더 본래의 모습이 아닐지. 그렇게 생각이 미치게되면, 나는 그때 위장전입을 하지 않고 그대로 과천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자주 궁금해지기도 한다. 고학을 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다닌 아버지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일이기에, 지금 와서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청문회장에 서 있는 누군가를 사회지도층으로서의 부도덕함을 들어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바라건대, 이 글을 혹여나 보는 어느 부모가 아이를 위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는 그것이 아이의 양심에 비추어서도 합당한 일이 될런지, 그래서 그 자신의 영혼에 모순되지 않고 떳떳하게 당당하게 여길만한 것일지 지혜롭게 헤아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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