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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Jun 23. 2024

잡초가 전하는 지혜

점심시간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티브이에서 인근 지자체가 해바라기 축제를 연다는 광고영상이 나왔다. 그걸 바라보던 동료 직원이 말했다.


“이사 가면 해바라기 그림을 선물로 종종 하잖아. 씨앗 많은 해바라기처럼 재물이 많이 들어와서 번창하라는 의미로 그러는 것 같아.”


요즘 정원을 가꾸면서 잡초와 전쟁을 벌이느라 지쳐서인지 나도 모르게 뿔쑥 삐딱한 말이 튀어나왔다.     

“씨앗은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것인데, 잡초를 능가하는 게 없을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고 심지어 잘 뽑히지도 않아요. 게다가 씨앗은 왜 그리도 많이 맺히는지. 재물운을 원한다면 집들이 그림으로 해바라기보다는 잡초 그림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내 얘기를 들은 직원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요즘 잡초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식물들이 왕성하게 자라날 때 잡초도 예외가 아니니 말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뽑고 돌아서면 자라나 있는 게 잡초다. 정원의 잡초 중에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새포아풀, 질경이, 까마중, 미국 자리공, 괭이밥, 며느리배꼽, 명아주, 망초, 쇠비름, 쇠뜨기, 그리고 바랭이가 있다.


특히 산책로와 돌틈에 자라나는 바랭이는 거의 악마 수준이다. 땅으로 기어서 자라는데 마디마다 뿌리가 달려서 번식하는 종이다. 뽑으면 이파리만 뜯기고 뿌리는 좀체 뽑히지를 않는다. 나중에 다시 보면 또 그 뿌리에서 잎이 나서 옆으로 번지고 있는 걸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다. 좀비처럼 무섭다.


최근 도서관에서 우연히 잡초와 관련한 책이 눈에 띄어 집었다. 식물학자이자 잡초 전문가 이나가키 히데히로가 쓴 <전략가, 잡초>라는 책이었다. 나는 잡초의 박멸 노하우나 쉽게 제거할 수 있는 꿀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거늘 일단 적을 알자.” 쾌재를 부르면서 책을 펼쳐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스럽게도 잡초를 완전히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도 영원히 말이다. 사람이 작물을 재배하거나 거주하면서 경작지, 잔디밭, 도로 등 특수한 환경을 만들게 되었는데 거기에 적응한 것이 잡초라고 한다. 인류는 작물과 함께 잡초도 길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작물과 잡초는 동전의 양면, 우리 마음속 선과 악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히데히로를 통해 세계 각국에 잡초학회가 있다는 웃픈 현실을 알게 되었고 끈질기고 강인한 잡초가 사실 자연계에서는 약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은 의외로 우리네 인생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평생을 식물과 함께한 학자가 자연에서 배운 인생철학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잡초 제거 꿀팁을 기대했다가 뜻밖에 인생 조언 하나를 건지게 되었다.


그가 자연을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은 모든 생명체는 ‘넘버원이자 온리원’이라는 것이다. 자연 생태계 특정 환경에서는 치열한 먹이활동을 통해 넘버원만 살아남게 된다고 한다. 2등과 3등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여러 층위가 존재하므로 그 각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은 사실 넘버원, 즉 승자라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남았기에 온리원이다. 마치 자연은 강자와 약자가 스펙트럼처럼 공존하는 다양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넘버원들이 온리원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사자도 달팽이도 저만의 세계에서 넘버원이자 온리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있는 당신은 40억 년 생명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진 최고이자 오직 단 하나, 행운의 존재이기에 다른 이와 비교하며 기죽지 말고 자신만의 소중하고 특별한 장점을 사랑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텔런트 조승우가 불러 유명해진 곡이다. 그 뮤지컬의 원작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Dr. Jekyll anc Mr. Hyde)다. 지킬 박사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위해서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해 내는 약을 개발하게 된다. 임상실험이 벽에 부딪히자 그는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약을 복용하였고 그러자 지킬 박사의 내면에 숨겨진 악이 하이드라는 인물로 변신을 하게 된다. 약물을 통한 변신으로 탄생한 하이드의 악행을 즐기던 지킬은 점점 강해지는 악의 힘에 결국 희생되고 만다.


인류가 작물 재배를 하다 보니 잡초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처럼 선과 악을 분리하여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행위는 또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현인이나 성자들의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라’는 진리의 말씀이 온당하고 지당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순수성의 추구 그 자체가 인간에게 등불 같은 지혜의 길이자 동시에 끝없는 숙명의 길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어느 저명한 생물학자는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고 말했다 한다. 어쩌면 순수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모든 욕망은 곧 자연의 인과율과 씨름해야만 하는 숙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정제되고 순수한 설탕의 달콤함이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하지만 한편으로 중독되어 건강에 악영향을 주듯이.


잡초 하나 없는 정원, 절대 선의 완성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원하지도 않고 또 다른 괴로움만 유발해서 종래는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는 게 아닌가 한다. 정원이든 마음이든 적절하고 끊임없는 관리가 최선이지 않을까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벼운 운동을 하고 나서 출근 준비를 하는데 요즘은 한 가지 루틴이 더 생겼다. 잠시 자투리 시간을 내서 정원의 풀을 뽑는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잡초 뽑기에 집중하다 보면 늦어져서 허둥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오늘도 풀을 뽑고 있다가 모기에 물린 종아리를 긁고 있을 때였다. 모기에 물린 곳은 되도록 손을 대면 안 되는데 긁으면 묘하게 시원하면서 근질거리는 쾌감 때문에 자꾸 손이 가게 된다. 마치 멀리해야 할 악을 자꾸 건드려서 화를 자초하는 지킬 박사처럼 나의 장딴지는 어느새 퉁퉁 부었다. 아! 이 어리석음이여.


막 잠이 깨어 부스스한 얼굴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풀 뽑는 거 힘들다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더니 올해는 유난히 부지런을 떠네. 덕분에 내가 편하게.” 잡초 전문가 아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은 내일의 잡초가 돋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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