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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Jun 09. 2024

용강고개

달도 없이 늦은 밤. 퇴근해서 휘어져 굽이치며 넘어가는 고갯길. 번쩍이는 화살표 조심해라 경고하며 야단법석 요란하다. 교통사고도 음주단속도 아닌 야간 도로 재포장 공사. 사고위험 안내판과 유도등 불빛에 속도 줄고 차선도 줄어들어 목동의 회초리 맞으며 우사로 들어가는 소떼처럼, 한 줄로 천천히 넘어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앞차의 엉덩이 보며 천천히 넘어갈 때 어슴푸레 떠오르는 당신 모습.


삼십 후반 울 아버지 넘어오던 그 고갯길. 빨간 버스 막차 놓쳐 걸어 넘던 그 고갯길. 터덜터덜 발바닥 너덜너덜 자존심. 마산 오동동 통술집 마담의 웃음소리, 동료들의 흰소리, 흥성스런 분위기에 혼곤히 취해 흔들흔들 갈지자로 돌아드는 고갯마루. 홀로 맞이하는 캄캄하고 적막한 산속. 스산한 바람소리, 부엉이 울음소리,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짐승의 발자국 소리 오싹하고 두려워도 죽일 놈 살릴 놈, 온갖 관계 뒤엉킨 세상살이가 더 무서웠으리.


외상값 대출금, 떼어주고 갚아주고 헐렁해진 월급봉투 가슴팍에 넣고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던 그 고갯길을 십팔번 배호 노래 길동무로 넘었으리. 외롭고 스산한 모퉁이 돌아들며 ‘돌아가는 삼각지’ 구성지게 흥얼거릴 때 밤하늘 별빛에 반짝이는 눈물방울. 이윽고 저 멀리 토담집 창가에 말수 적은 아내처럼 깜빡이는 작은 불빛. 서러움과 그리움 어느 것이 먼저 마중 나왔을까. 따스해지는 가슴에 노래 장단도 흥이 나서 빨라지는 발걸음. 개구리 울음소리, 뼛속까지 그리운 고향의 향기, 논두렁 풀잎에 맺힌 밤이슬에 바짓자락처럼 흠씬 젖어드는 가슴 한 자락. 아직 까맣게 몰랐으리 사랑하는 사람 떠나보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별빛은 가로등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고 도로 공사로 경고 불빛 휘황하게 번쩍이는 그 고갯길. 오늘도 넘어가는 늙은 아들 귓가에 처연히 들려오는 젊은 애비의 노랫소리.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한 서린 그 노래. 어디서 길어 올려져 이렇게 내 마음 저미나. 그에게 짐 지워진 한 많은 인생의 고갯길이 가슴 먹먹해서 뒷모습을 끌어안고 서러움 마를 때까지 그렇게 울고 싶다.


옛길은 뱀처럼 굽이굽이 휘돌았을 터인데. 다리미로 쭉 민 듯 곧아지고 넓어져 나는 이제 그 길을 차를 타고 넘어간다. 몸으로 넘던 애비의 길을 이렇게 쉽게 넘어서지만 내 마음은 아득한 비포장길 구만리. 젊은 애비의 노래가 사무치게 그리운, 달도 없이 늦은 밤. 세월이 흘러도 세대가 바뀌어도 사내의 설움 여전히 굽이쳐 흐르는 바로 그 용강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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