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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May 19. 2024

플란다스의 인형

봄날 이른 아침이었다. 정원을 한 바퀴 돌다가 분꽃나무에서 발길이 멈췄다. 수국처럼 생긴 꽃의 향이 마치 화장품처럼 향기롭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얀 공처럼 생긴 꽃. 다가가 향을 맡으려는데 꿀벌 한 마리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요즘 보기 어려운 꿀벌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미동이 없어 자세히 살피니 죽어 있었다.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순백의 꽃봉오리 한가운데 조그만 꿀벌이 엎드려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


지난 삼월 어느 날, 유난히 따뜻한 날씨가 이어져서 꽃들이 일제히 피어났을 때 기온이 뚝 떨어져 버렸다. 꽃을 찾아 날아왔던 그 벌은 갑작스러운 추위 탓에 얼어 죽었던 것이리라. 동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넬로가 갑자기 생각났다.


함민복 시인은 그의 시에서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라며 꽃을 찾는 벌의 생애를 찬탄했다. 분꽃에 파묻혀 잠든 꿀벌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것일까.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차창으로 사무실 인근에 있는 아파트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큰 도로를 경계로 한쪽은 고급 아파트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은 낡은 주택가가 펼쳐져 있었다. 주택지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강북, 아파트촌을 강남이라 부르며 자조하곤 한다. 그때 어느 직원이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언니로부터 전해 들은 에피소드 하나를 말해 주었다. 어쩌면 이제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얘기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어느 엄마가 자녀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하나둘 아이들이 도착했는데 느지막이 초인종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같은 아파트가 아니라 큰길 건너 주택가 전셋집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아이가 찾아왔더란다. 그 엄마는 아이를 보자 말했다. “파티가 취소됐는데 어쩌지. 얘기를 미처 못 들었구나.” 그 아이는 현관에 놓인 또래 아이들의 신발을 힐끗 쳐다보고는 돌아섰다고 했다.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돌아선 그 아이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자신의 낡은 집을 향해 뚜벅뚜벅 홀로 걸었을 것이다. 선물로 준비한 인형을 시린 가슴에 꼭 그러 안고서.


어릴 때 눈물을 훔치며 읽었던 동화책이 하나 있다. 바로 ‘플란다스의 개’다. 주인공 넬로는 두 살 때 엄마가 죽자 외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우유배달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버려진 개를 주워서 기르게 되었는데 파트라슈라 이름 붙였다. 성견이 되자 노쇠하여 힘이 부친 할아버지 대신 우유수레를 끌어 주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넬로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에 집이 너무 가난했다. 루벤스처럼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었고 그의 그림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엔트워프 성모마리아 성당에 보관된 루벤스의 그림은 돈을 내야 볼 수 있었기에 가난한 넬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넬로에게는 알루아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방앗간을 운영하는 알루아의 아버지는 부자였는데 가난한 데다  부모도 없는 넬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알루아의 아버지는 알루아의 생일파티에 넬로는 초대하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춤추고 노래를 불렀지만 넬로는 쓸쓸히 파트라슈와 함께 작은 오두막에 있었다. 파트라슈를 안으며 넬로가 말했다.


“괜찮아, 파트라슈. 괜찮아, 조금씩 달라질 거야.”


어느 날 방앗간에 불이 나자 알루아의 아버지는 넬로의 짓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넬로에게 일거리도 주지 말도록 마을 사람들을 부추겼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집세를 내지 못한 넬로는 결국 집에서 쫓겨났다. 차가운 겨울 거리를 헤매다가 넬로는 성당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 앞에 쓰러진 넬로는 그를 찾아 따라온 파트라슈를 꼭 그러안은 채 얼어 죽었다.


벨기에 사람들은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알아도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영국인이 쓴 소설인 데다 아이에게 너무 차갑게 대하는 자국의 현실을 그렸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 소설은 산업혁명기 무렵에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아이들의 심각한 상황을 반영한 소설이기도 할 것이다. 국내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이 티브이에 방송되면서 유명해졌고 넬로가 숨진 것으로 그려진 벨기에 그 성당은 일본인들이 대거 방문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한다.


또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최고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태평양전쟁이 배경인 ‘반딧불이의 묘’라는 슬픈 이야기도 떠오른다. 전쟁이나 기아가 발생하면 제일 고통받는 이들은 바로 여성과 아이들이라는 점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 진실이리라.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의 이면에 도사린 차별과 격차, 과도한 경쟁과 각자도생,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과 장벽을 변혁해야 한다는 진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또 다른 슬픈 동화가 이 땅 위에서 쓰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에게 ‘괜찮아, 조금씩 달라질 거야.’라고 희망과 위로의 말만 되풀이하며 전해주면 되는 것일까. 봄날 아침, 분꽃 위에서 얼어 죽은 벌을 보며 넬로의 이야기가 처연하게 오버랩되었다.


어디서 시린 가슴에 인형을 안은 아이가 울면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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