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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May 12. 2024

비행기가 뜨는 이유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져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사람과 친한 자가 넌지시 빗대어 편드는 소리는 우리의 분노 게이지를 더한층 끌어올린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 반대편의 말만 듣고 어설프게 오지랖을 떠는 일은 그래서 안 하느니 보다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하고 또 내가 그런 사람이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것일까?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타인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 것일까?


얼마 전 건물 크기만 한 비행기가 하늘로 뜨는 원리를 아직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비행기 날개의 아래쪽은 편편해서 압력이 높고 위쪽은 곡면이라 압력이 낮아서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베르누이 이론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히 설명되지 않는다 했다. 달에 착륙하고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과학의 시대에 버스처럼 평범한 일상이 된 비행기의 뜨는 원리를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들렸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노벨상을 받은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의 얘기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양자역학의 원리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를 사용하고 전기자동차, 휴대폰 등 온갖 전자제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그 원리를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조그만 꼬마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 판소리 명창이 아홉 시간 동안 완창을 해내는 것.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하는 것.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위험과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는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각종 사건 사고 기사를 접할 때면 종종 듣는 얘기가 있다. “조용하고 문제도 없었어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너무 착실한 사람이었어요.”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설명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일까 내 모습은 어떤지 남의 속사정은 괜찮은지 궁금해서 골상학을 믿고, 사주궁합을 따르고, 혈액형별 성격유형에 기대고, 또 요즘엔 MBTI를 서로 묻는다.


수십 년 같이 살아도 잘 모르는 한 인간을 우리는 정말 잘 알 수 있는 걸까? 그런 사람들이 관계 맺으며 빚어내는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 착각으로 섣불리 훈수를 두려는 욕망은 어리석음을 자양분으로 피어나는 독버섯 같은 것인지 모른다. 정작 제대로 된 도움을 주거나 혹은 끝까지 책임질 생각도 없으면서 어느 한쪽에 숟가락 척 올려서 ‘나 네 편 들어줬다’하고 손쉽게 생색내려는 행동은 여우처럼 비열하다. 그런 행동은 외려 관계의 악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함부로 속단해서 어설픈 간섭과 참견을 누군가에게 실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전문용어로 ‘오지라퍼’라고 부른다. 오지랖은 우리들의 오만과 편견에 의해 종종 벌어지는 사태이다.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깨달으셨나요?”

“아니요.” 그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라고 고백했다.


비행기의 뜨는 원리는 베르누이의 법칙으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과학자들의 말에서 나는 겸손을 배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작은 법칙 하나로 만물을 다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는 과학자들의 겸허한 자세가 어쩌면 비행기를 뜨게 하는 숨겨진 원리인지 모른다.


관계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겸허하게 들어주는 일 아닐까. 모두 말하기에 바쁘고 제멋대로 이해하거나 참견하기 쉬운 세상에서 듣는 행위는 어렵고도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 오른다면 말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들어주고 제대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경청을 행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타인의 곡절 많은 얘기를 소가 여물 씹듯이 질겅질겅 씹어대기만 해서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건 단순히 수동적으로 할 만큼 했다는 면피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자신의 생각에 녹여 넣는 소화의 시간일 테니까.


서로를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일. 고통과 희망의 언덕을 오르는 삶이라는 기적의 시간. 그 속에서 밝은 대낮을 캄캄한 밤처럼 헤매는 나그네들인 우리. 각자의 어둠을 빛이라 착각하지 말자. 우리는 삶을 모른다.


앞서고 참견하려는 성급한 말의 고삐를 잡아 당기고 가만히 귀 기울이자. 상처가 아물고 미움이 걷히고 사랑이 싹트도록 지켜봐 주고 북돋워주자. 비행기가 살며시 떠서 하늘로 오르듯 그렇게 삶의 비밀이 우리 안에 평화로이 깃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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