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세 마리를 막내는 열심히 돌보고 있다.
세 마리의 먹고 자는 것을 챙겨주고 몸상태를 살펴주면서 빗질도 해주고 산책도 시켜준다.
아이는 가끔 강아지 돌보기에 지치거나 더 이상 시간을 양보하기 어려울 때면 강아지를 뒷마당에 풀어놓는다.
그러면 강아지들은 바깥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다니면서 불만을 잠재우다가 다시 들어와서 조용히 누워 잔다.
막내만의 강아지 돌보기 노하우이다.
기간제 교사를 나갔을 때 나에게는 돌봄 노하우가 부족했었다.
학급을 담임하는 동안 ‘교사자격증이 왜 필요하지?’ 할 정도로 교사라기보다 단지 교실 엄마가 되어 이리저리 아이들을 살피면서 정신없이 보내기만 했다.
기간제 기간에 학부모 면담이 있었다.
한 어머니가 작은 수첩을 무릎에 가지런히 놓고 상담하기 위해 앉아있었다.
그 어머니는 같은 학교 병설유치원 교사였고 직원회의 시간에도 함께 참여하곤 했다.
동료 교사인 것이다.
활발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그 동료 교사의 아이를 칭찬하고 교실에서 파악한 아이의 교우관계도 말씀드렸다.
내 말이 끝나자 감사의 말을 간단히 전한 그 엄마는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다며 조용히 수첩을 펼치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아이가 예전 선생님 때는 안 그랬는데 알림장을 잘 적어오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두 번째는 자신이 같은 급식을 먹어서 급식 메뉴를 알고 있는데 급식지도가 잘 안 되는지 급식을 많이 남기거나 잘 안 먹는 것 같다며 예전과 달라진 급식지도를 지적했다.
말하자면 예전 선생님처럼 모든지 검사를 해서 아이들의 생활을 철저히 돌봐 달라는 뜻인 듯했다.
기간제 교사이기에 아이들과 이전 담임선생님과 한 약속들을 가능한 유지 하면서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나름 애쓰고 있었는데 당황했다.
그 동료 교사에게 인성교육을 위해 준비한 짝꿍 바꾸기 놀이에 대하여, 역할놀이 정하기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협력하는지, 국어 수학 통합교육에 어떻게 아이들이 참여하는지 들려줄 수가 없었다.
동료 교사의 수첩 속에는 선생님의 교육관에 관한 질문은 없는 것 같았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기간제 돌봄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을 믿고 신뢰하는 시간을 먼저 갖기보다 아이들의 공책과 책과 숙제와 알림장 검사에 매진했다.
교사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책과 공책을 살피고 빨간색 연필로 채점을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파란 펜으로 책과 공책에 작은 메모로 교감하는 교육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의 학년 평가를 파일에 정리해서 예쁘게 장식품처럼 교실장에 번호순으로 꽂아 놓기만 했지 아이들이 왜 어려워하는지 어떻게 지도할지를 고민하며 자료를 만들거나 즐거운 학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연구하지 못했다.
책이 쓰러져있거나 먼지가 쌓인 곳이 없게 열심히 걸레로 교실 수납장을 닦으면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못했고 읽기 전 독서지도를 위한 깜짝 활동이나 읽고 난 후에 곰돌이 모형 종이에 책 내용을 적는 귀여운 독후 활동도 하지 못했다.
급식이 나오면 아이들 먼저 주고 골고루 먹게 권하고 다 먹었으면 잘 먹었는지 검사하면서도 왜 골고루 먹어야 하는지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 몸을 어떻게 튼튼하게 하는지 아이들과 뱃속 상상여행을 하지 못했다.
잘 안 먹는 친구들에게는 ‘한입만 더’ 멘트를 날리며 아이들과 잘 먹기 씨름만 했지 아이들이 왜 그 음식을 싫어하는지 어떻게 잘 먹을 수 있을지 아이들과 토론하며 재미난 책 만들기를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우유를 먹을 때는 우유송을 틀어주거나 우유를 안 먹은 친구가 있는지 매일 표시하며 검사만 했지 우유의 장단점을 표로 만들어 서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알림장을 잘 적었는지 검사하기만 했지 가정과 학교와의 소통을 생각하면서 아이의 작지만 감동적인 학교에서의 행동을 알림장에 적어 가정에 알리지 못했다.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게 쓰는 ADHD친구를 위해 알림장 내용을 문자로 아이의 어머니께 매일 보내드리기만 했지 그 아이가 위험한 물건이나 말로 친구들을 협박하지 않게 부모님과 의논하거나 아이를 위해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진지하게 걱정하고 상담하지 못했다.
돌봄은 나의 교육적 생각과 무관하게 질서 있게 매일 진행되었고, 그 돌봄을 마치고 나면 교육적 역량을 펼치기 위한 여력과 시간이 부족했다.
돌봄이 교실에서 기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신 저학년 베테랑 선생님의 학급에서는 학기초부터 약속과 습관 형성을 통해 체계적으로 돌봄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고학년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돌보는 시스템을 마련하신 선생님들도 계셨다.
그 선생님들은 다소 여유 있는 교실 운영을 하고 계셨다.
물론 남는 시간들이 학교 업무에 쓰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몇몇 선생님들은 자신의 교육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계셨다.
돌봄에 힘을 다 뺀 나는 본업을 잘 지키시는 그 선생님들이 부러웠다.
엄마이었기에 돌봄의 역할이 어쩌면 더 자연스럽고 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교사로 학교에 나갔다.
여러 새로운 교육방법들을 아이들과도 함께 해보고 싶다는 기대를 안고 출근했다.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학교에 적응하면서 교육적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고 바삐 나가야 하는 수업 진도는 결국 나를 돌봄에만 머물게 하고 말았다.
문득 학급에 ADHD 학생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아 아이를 준비 없이 만났던 것과 기간제 선생님이 책임감 있게 학급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계약기간이 학기 단위로 되어야 하는데 굳이 2학기 첫날부터 출근하면서도 방학 시작 바로 전 날까지만 계약한 것들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학교가 그냥 돌봄 교사만을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난 왜 몰랐을까?
‘기본 중의 기본인 돌봄이 바로 교육이야’ 하는 학교의 철학과 학부모의 요구를 몰랐던 것이다.
대충 아이들의 등교 기간만 맞추어주고 아이들의 안전과 급식, 청소 등을 담당하면서 교과서 읽으면서 홈런 컴퓨터로 한 학기 진도 쭉쭉 빼주기만을 바랬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적 접근을 하거나,
특별교실에서 놀이를 하거나,
교실에서 참여수업과 융합교육을 하거나,
그림책놀이를 하거나,
고학년처럼 한 학기 1권 읽기를 저학년 버전으로 하거나 하는 일은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눈치 없이 기간제 교사에 응했던 내가 한창 회의감에 빠져들 즈음 노크를 하고 빼꼼히 교실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온 동료 교사이자 학부모는 내가 수업 전 아침 자습시간에 교실을 비웠다고 한차례 더 지적한다.
오전에 연구실에서 동학년 미팅을 할 때마다 아이들만 두고 온 교실이 걱정돼서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기는 했지만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다른 선생님들의 조언이 필요해 잠시 독서 자습을 하도록 하고 자리를 비웠는데 바로 딱 걸린 것이다.
시어머니도 그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교실에 선생님이 없었다고 하며 증거 나열에도 최선을 다한다.
동학년 선생님들께 그분의 지적을 말씀드리니 함께 속상해하시더니 미안해하셨다.
언제부터인지 학교는 교육보다 돌봄의 역할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돌봄에 왜와 어떻게를 넣으면 교육이 되는데 우리 학교는 왜와 어떻게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학부모가 교사를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학교는 돌봄을 교육이라 생각하고 그러다보니 수업 속에 창의적인 열정을 집어넣는 교사보다 그렇지 않은 교사가 더 많아지게 된 학교의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오늘도 강아지 돌보기에 여념이 없는 막내는 이제 자신을 돌볼 시간이라며 책을 펼친다.
돌봐주기 2종 세트(자신과 강아지 돌보기)를 동시에 하는 아이에게 돌봄과 교육은 하나가 된 것 같다.
글을 다시 보니 교육과 돌봄을 굳이 구분하면서 학교와 맞짱 뜬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저출산 시대에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학교의 고민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학교 1층에 이미 자리 잡은 편안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돌봄 교실 속 선생님들은 아이의 간식을 챙겨주시면서 아이와 또 다른 교육적 교감을 하고 계셨다.
학교는 이제 오른팔, 왼팔처럼 교육과 돌봄이 한 몸이 되어 조화롭게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학교를 응원하며 학교의 고민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해결이 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