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환경
30년 전
아이들은 우리 반이 천사들의 합창(당시 유행하던 어린이 프로그램) 같다고 했다.
교사 첫해에 만난 2학년 친구들은 너무나 예뻤다.
작은 사진기를 사서 아이들과 나의 교사 첫해의 모습을 담았다.
요즘 집 정리한다고 사진을 정리할 때마다 그때 그 아이 들을 만난다.
사진과 함께 연구보고서라고 적힌 공책도 발견하였다.
그 당시 학교에서 모든 교사들에게 연구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공책에 손글씨로 적어 아이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그 보고서는 우리 반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와 안 다니는 아이들, 다닌다면 몇 군데 학원을 다니는지 다니는 것에 대해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학원을 3-4곳을 당연하다는 듯이 다니는 아이도 있었고, 학원 다니기를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만난 부모님들은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때 학원을 다니던 아이들 세대는 다시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학원으로 보낸다.
학원을 보내는 이유는 조금 변했겠지만, 아이들의 학원과 학교를 오고 가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학원 다니기는 세대를 넘어서 하나의 교육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학교의 모습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단순한 도구의 발달면에서 비교한다면 변화가 있었다.
미세먼지가 있어 공기청정기가 생겼고, 교실에 비치된 tv브라운관이 얇아졌고, 교실 청소도구가 빗자루와 물걸레에서 청소기로 변하면서 (학교마다 다르지만) 세상의 기술 발달이 교실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학급의 학생수가 줄어 책상수는 줄어들었지만 사물함이 교실을 여전히 채우고 있어 학급의 빈 공간이 넓어 보이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네모반듯한 교실의 모습을 조금 다르게 해 보기 위해서는 오직 책상의 배치를 다르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 듯했다.
모두가 익숙한 앞을 나란히 보고 있는 책상을 일자로 서로 마주 보게 하거나 조별 책상 형태로 하거나 중정처럼 가운데를 비우고 ㄷ책상 배치를 해보았더니 30년 전의 바로 그 '책상 위치 바꾸기'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혼자 멋쩍어지기도 했다.
학생수는 줄었지만 활동수업을 하기 위한 교실 구도는 여전히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상 바꾸기와 함께 하는 짝 바꾸기는 새 짝에 대한 기대감에 두근거리고 설레는 아이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최고인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가 아이들에게 주는 몇 안 되는 즐거움중 하나인 것 같다.
다시 나간 학교에서 짝 바꾸기도 교실의 모습도 선생님의 열정도 큰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은근히 기대한 변화는 학생수가 줄어든 만큼 학교의 남은 공간들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활동수업에 활용되거나 전교생이 오고 가다가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네모 반듯한 학교의 모습이 다소 동글동글해지고 아이들의 감성을 키워주는 ebs다큐 방송에 나오는 시범학교 같은 모습이 사방에 있기를 바랐다.
알록달록 학교 건물 겉면이 색을 입고 화장실도 환하게 깨끗해진 만큼 아이들의 얼굴도 환해지는 학습공간과 활동공간이 늘어나기를 바랐다.
교실 뒤 게시판이 벽면 꾸미기 펠트지를 만드는 회사에서 나온 알록달록 벽면 꾸미기 글씨와 나무들이 수놓은 곳이 아니라 아이들의 다듬어지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그림과 낙서와 보고서들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기를 바랐다.
교실 정면의 초록칠판이 분필가루 날리는 일 없는 하얀 화이트보드에 밀려났지만 다양한 색색의 보드펜으로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수업이 되도록 바닥에서 천장까지 커다란 보드로 있기를 바랐다.
개성이 강하고 다소 이기적이거나 문제가 있는 친구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더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를 바랐다.
학교의 변화는 쉽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학교가 변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행정가, 교사, 학부모, 학교를 만드는 건축가, 교육전문가 모두가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는 방법이 서로 다른 그 많은 전문가들은 결국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일을 빼먹었던 것 같다.
잊지 말아야 할 그 일을.
‘선생님 교실에서 우산 펴고 놀아도 돼요?’ 하는 아이들에게 ‘그러렴.’ 했다.
그런데 우산 안에 들어가지 못한 몇몇 아이들이 슬퍼했다.
우산을 여러 개 펴주다가 뾰족한 우산 끝이 아이들을 다칠까 두려워 소심한 기간제 교사는 그만하라고 했다.
미세먼지 가득한 날 계단 옆 넓은 공간에서 줄넘기 급수 연습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아이에게 ‘그러렴’했다.
계단을 오르내리시는 교무 선생님과 다른 학년, 옆반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다가 그만 하고 교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30년 전 교사의 소심함도 변하지 않고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