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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에 누워

속세를 떠난 산에서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건만(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山非離俗) 속세가 산을 떠난 것이다(俗離山).”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俗離山)에 와서 지은 시다. 카르투시오 수녀원이 있는 충북 보은을 십년 넘게 드나들면서 속리산을 자주 지나쳤건만 이제서야 속리산을 만나게 되었으니 여전히 속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의 불찰 때문이겠다.


속리산 가는 길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1464년) 가마가 소나무 아랫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이 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 벼슬을 내렸다는데 그래서인지 속리산 입구에서 나를 맞이하는 정이품송이 예사롭지 않다.

정이품송


무엇보다 법주사 일주문을 통해 불국정토에 들어서고 나서 이내 나타난 호수는 맑은 물에 비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동안 도(道)멀리했던 과오가 보인다.


속리산 정상은 천왕봉(1,058미터)이지만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은 제2봉인 문장대(1,054미터)다. 그래서 나는 먼저 천왕봉을 오른 뒤 백두대간 봉우리들을 따라 문장대에 다다랐다.


아무도 없는 문장대에 올랐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도 이렇게 멋진 바위 정상을 보지 못했다. 누가 말한 것처럼 문장대에 세번 오르면 사후에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나옴직했다.

속리산 문장대와 그곳에서 바라본 산하


원래 문장대는 하늘 높이 치솟아 흰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雲藏臺)로 불리웠는데 세조가 요양차 속리산에 왔다가 운장대에 올라 신하들을 가르치고 시를 지어 문장대(文藏臺)가 되었다고 한다.


문장대에 누워 하늘을 본다. 산 구름 바람 바위 그리고 나, 시가 저절로 나올 것 같다. 


세조는 무슨 시를 지었을까? 그의 시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영월로 유배시켜 죽인 비정한 권력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졌지만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저주와 같은 종기로 고생을 하다가 요양차 속리산에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권력도 구름처럼, 목숨도 바람처럼.


세조가 지은 시는 분명 회한의 시였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며 비참한 자신의 현재와 얼마남지 않은 세상의 시간 앞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시를 읊었을 것이다.

문장대에 누워 바라본 하늘


문장대에 누워 따뜻한 햇살 아래 바람의 고요와 함께 나 역시 시를 읊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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