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과 덕유산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는 이를 한눈에 사로잡는 기암이 마치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주왕산 정상인 주봉은 720미터로 가벼운 1시간 산행길이었다.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성큼 다가온 상큼한 봄을 느끼며 걸을 수 있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도 많았지만 머지 않아 그 자리에 새싹이 나고 녹색의 생명이 자랄 것을 상상하니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마저 가벼워졌다.
어느새 발길은 용추협곡으로 이어졌다. 갑자기 무릉도원이 열린 듯 깎아지는 바위 사이로 물이 세차게 흐른다. 계곡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풍경은 마치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고운 아가씨를 만난 듯 반가웠다.
청송 주왕산의 매력은 바로 용추협곡에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한라산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도 등재된 주왕산은 물과 바위, 산이 절묘하게 조화된 아름다운 곳이었다.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하여 이름 지어진 시루봉이 내게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악당 다스 베이더 얼굴처럼 보였다.
주왕산을 내려와 향한 곳은 주산지였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호수 위에 떠 있는 절(temple)로 잘 알려진 곳이다. 주차장에서 이십분을 걸어 올라가니 조선시대 만들어진 아담한 주산지가 나를 맞았다. 생각보다 작았고 영화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왕버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주산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언젠가 가 보았던 캐나다 국립공원 벤프에 있는 루이제 호수가 떠 올랐다.
부활과 함께 봄이 왔다. 그래서 사전투표를 하고 선거일에 제법 먼길을 나섰다.
이십년도 더 전에 '새만금 갯벌을 살려주세요'라는 팻말을 달고 본당 청년 네명과 함께 대구에서 전북 부안 새만금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일이 있다(왕복 500킬로). 그때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던 곳이 덕유산이었다. 삼복더위에 자전거를 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올랐는데 이제야 그 산을 만나러 간다.
무주 구천동 계곡은 북쪽으로 흘러가는 금강과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수원지답게 물이 많았다.
계곡을 따라 난 암행어사 박문수의 '어사길'은 깊고 깊은 산 속으로 이어져 백련사에 이르자 멈췄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6.6킬로미터, 이제 정상인 향적봉까지 남은 길은 2.5킬로미터였다.
그런데 백련사 뒤로 오르자 정말 빡신 길이 나왔다. 그 옛날 자전거를 낑낑 끌고 올라가던 것처럼 가파른 산길에서 내 몸을 끌고 올라가야했다. 중간에 한번씩 '2분만 쉬어가세요'라는 푯말과 함께 '심정지 사망지점'이 종종 등장했다.
동네 아저씨를 무시하면 안되는 이유는 맨날 허름한 추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지만 때가 되면 영웅이 되어 나타나는데 그 아저씨가 덕유산이었다.
결국 세시간 산행 끝에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높은 향적봉(1,614미터)에 도달했다. 백두대간의 중심에서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내장산, 남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계룡산이 보였다.
가볍고 눈이 즐거웠던 주왕산 아가씨와 깊고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서야 진면목을 보여준 덕유산 아저씨 모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의 두번째 산티아고는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