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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무등산

오늘의 의미

처음에는 소백산을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희방사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주말에는 주차가 어렵다는 글을 읽고 전날 광주 무등산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무등(無等)산에 오르기 시작하고나서야 바로 그날이 5.18인 것을 알았다.


세계적으로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에서 광주처럼 1,000미터가 넘는 산(무등산 1,187미터)을 가진 곳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국립공원에서 보지 못하던 장면이 많았다.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 어머니, 꼬마 아들과 산에서 쉬고 있는 아버지, 대학생 그룹, 젊은 커플을 계속해서 만났다. 마치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에 무등산의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바닷가에서나 보았던 주상절리를 무등산 정상에서 만났다.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식을 때 수축작용에 의해 수직 돌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절리(節理)중 무등산 주상절리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라고 한다. 최정상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입석대 주상절리는 가히 일품이었다.


무등산의 부드러운 능선은 어머니 유방처럼 편안하고 포근해 보이는데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서석대(1,100미터)에서 '어머니 무등산'이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최정상 천왕봉에는 군부대가 있다)


무등산은 한라산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제주 한라산처럼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면서 항상 그 자리에서 위로가 되어 준 어머니였다. 제주에 4.3이 있다면 광주에는 5.18이 있다.



1999년 신학교 1학년일 때 '노숙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5일동안 노숙을 하면서 노숙자들의 삶을 체험하는데 우리 각자에게는 3만원이 주어졌다. 물론 아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연락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때 나는 무작정 광주행 버스에 올라 망월동 묘역을 갔었다. 말로만 들었던 5.18 광주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고 그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전남대 총학생회실을 찾아가서 대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노숙을 하면서 먹었던 학식이 맛있었다. 며칠 뒤 88고속도로 톨게이트에 가서 차를 얻어타고 대구로 돌아왔다. 그것이 나의 첫 광주였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국립5.18민주묘지에는 오전에 대통령이 다녀간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5.18 민주항쟁추모탑에서 헌화하고 묘지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이 나의 눈을 끌었다. 그는 전남대 대학생으로 19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끝까지 남아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한 이정연님이었다. 그의 묘비 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아무것도 헛됨은 없어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괴로움 당했던 것, 아무것도 헛됨은 없어라."(이정연 일기중에서)


5.18민주묘지에는 기도하는 수녀님들과 신자분들도 있었는데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해진 묘지를 찾아가서 다른 학생들에게 열사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었다.


문재학님은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집에 돌아오라는 부모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갖가지 심부름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내어놓은 탓일까, 그의 무덤 앞에서는 고운 엽서가 많았다. 


엽서 가운데 하나를 집어 읽어본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내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은 열사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었다는 말이 맴돌았다. 


우연히 무등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나는 잊었던 과거를 만나 놀라고 슬펐다. 자신의 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5.18 열사들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나라와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일, 자신보다 큰 이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일, 이 시대에는 더 이상 보기 어려운 일이 되었기에 부끄럽고 섭섭하기 그지 없다. 


살아남은 자는 여전히 슬프다.

국립5.18민주묘지에 휘달리는 추모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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